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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71 곡성 남원 능주 군산 함열 등지에서 무기와 전곡, 그리고 軍布 등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207) 예컨대 옥과의 경우 1만3천량을 징발하였고, 다시 주민들로부터 3천량을 징발할 때는 하급관리가 그중 절반을 착복하기도 했다. 208) 이 과정에서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들이 곡성에 들어와 수일동안 주둔한 적도 있었다. 음력 7월초에는 長城 霽岩里 출신의 李士弘 무리가 밤을 틈타 쳐들어와 곡성읍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곡성은 군기고의 무기와 민간의 재산을 남김없이 털리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피해가 많았으나, 간혹 농민군의 짐을 날라 주는 것을 기다리는 자도 있었다. 심지어 곡성은 인접지역 농민군의 위협에 시달리며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곡성의 토착세력과 향리들은 농민군에 대하여 대응태세를 갖추었다. 209) 즉, 守城將 金明局 호장 申正烈 首吏鄕 首刑吏) 등을 중심으로 타 지역 농민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들은 농민군을 막기 위해 각 면리마다 청장년을 모집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원성을 샀던 것 같다. 210) 그것은 한창 바쁜 농사철이어서 농민들은 일손이 달린 상황인데도 청장년들을 강제로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농민들은 관군의 힘만으로 막아주기를 기대하였다. 민간의 자체 조직만으로는 농민군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성의 수성군은 농민군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예를 들면, 곡성의 선비 김명국은 수성장이 되어 흩어진 奴令 및 閒丁 등을 불러 모아 사졸로 편입시켜 농민군에 대처하였다. 그리고 吏校 가운데 군사적 업무에 능숙한 몇몇 사람들과 계책을 숙의하고 실행하였는데, 호장 신정렬이 바로 그에 해당되었다. 이들은 각 리의 부유한 사람들로 하여금 군수물자를 각자의 능력에 따라 스스로 내놓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읍성을 지키려는 결의가 고조되어 주민들도 차츰 안도하였다. 때로는 인근지역에서 곡성으로 피해 온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농민군은 날로 증가하여 전라도의 모든 군현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곡성 역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수성장 김명국과 기타 수성군 간부로 참여한 사람들은 농민군으로부터 民砲로 지목되어 10여 차에 걸쳐 살해 위협을 받아야 하였다. 이들은 겨우 몸만 빼쳐 나와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얼마후 경군과 일군이 들이닥치자, 김명국은 복수하는 데에 앞장섰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힘을 다해 농민군을 체포하여 관군과 일본군에 보내었다. 그런데 12월 이후에 召募所로부터 김명국을 압상하라는 지시가 향리들에게 내려졌다. 비록 鄕論이었지만 무시할 수 없었는데, 이는 김명국을 시기한 세력의 무고에 의한 것이었다. 그후 김명국은 수성중군이 되어 5가작통법에 의한 주민 통제의 임무를 맡았다가, 순위영의 지시에 의하여 순창군으로 옮겨 근무하였다. 한편, 선비들의 요청에 의해 신정렬은 호장이 되었으며, 나이가 많아 207)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6쪽. 208) 위의 책 6, 57쪽. 209) 이하는 「谷城郡守報狀」(『동학란기록』 상, 99쪽)을 토대로 정리하였음. 210) 「兩湖招討謄錄」, 『동학란기록』 상, 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