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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그런데 곡성에서 이루어진 구체적인 폐정개혁의 목표와 방법 등은 잘 알 수 없고, 그저 곡성은 남원에 본영을 둔 김개남의 지시와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음력 5월 23일, 김개남은 태인과 순창을 거쳐 옥과 담양 창평 동복 보성 낙안 순천 곡성 등을 거쳐 음력 6월 25일 남원에 입성하였다. 206) 이로써 보건대, 김개남은 자신의 관할에 속한 전라좌도의 중요 지역을 순행한 후에 자신의 거점인 남원으로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곡성과 옥과 등은 일찍부터 김개남의 세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음력 9월경, 농민군이 2차 봉기를 준비하던 중 곡성에서는 커다란 사고가 발생하였다. 화약이 폭발하여 泰仁接에 소속된 농민군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개남의 조카 등은 모두 접주로서 남원에서 곡성으로 들어가 군수물자를 점검하고, 화약 너댓 섬을 운 반하여 마루방에다 옮겨놓고 소를 잡아 술자리를 벌였다. 마침 시중드는 나이어린 어떤 군인이 돌려 가며 마시는 술잔을 받기 위해 담뱃대를 화약가마니에 꽂았다. 잠시 후 담뱃대로부터 불이 일어나 화 약이 폭발하였다. 지붕의 기와장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졌는데 마치 병기가 내려 덮 치는 거 같았다. 적의 우두머리 일고여덟 명과 부하 칠팔십 명이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61∼262쪽). 이는, 1894년 음력 9월 경 2차 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곡성에 들어온 김개남의 조카는 군수물자를 지시한대로 준비하였는지를 확인하고서 술자리를 벌이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 사고로 김개남의 조카를 비롯한 접주급 지도자 7∼8명과 농민군 약 70∼8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대부분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의 직할부대로 태인접에 소속된 농민군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고 당시 김개남의 조카는 불 속에서 뛰어나와 말하기를, “우연한 사고일 뿐 곡성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다. 그는 자신의 火傷을 치료하기 위해 메밀을 발라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반나절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김개남은 처음에 조카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곡성에 쳐들어가 모두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조카가 죽기 전에 한 말을 전해 듣고 중지하였다. 한편, 김개남은 그의 가문에 24명의 접주가 있었으나, 그 중 네 명이나 불에 타죽었다. 이처럼 곡성은 전라좌도 농민군의 활동 근거지이기 보다는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곡성군의 지리적 위치가 깊은 산에 둘러 쌓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지만, 남원과는 들판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원의 김개남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9월경부터 206) 이진영, 「김개남과 동학농민전쟁」, 『한국근현대사연구』 2(1995), 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