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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69 올려 다시 재판한다는데 정씨의 집에서 鳴寃錄 수백권을 판각하여 셰계에 반포하였다더라. 라고 있듯이, 김형순을 鞠弘默의 아들 3형제가 사사로이 악형을 가하여 연루자로 지목된 진사 鄭寅岳을 죽임으로써 사건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정인악의 집안에서는 국홍묵 피살사건과 전혀 무관한데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을 계기로 재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국씨 형제들은 1898년에 재판이 확정되어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202) 이 사건은 담양의 향리층과 용구동의 농민군 사이에 해묵은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리라는 점을 짐작케 해준다. 당시 정씨 가문에서는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鳴寃錄을 수백권이나 간행하여 배포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1899년 4월에 전북 고창에서 체포된 담양 지역 농민군으로는 朱仁西(南山村) 朴元必(文殊洞)이 있다. 203)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여파가 식지 않고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된 金亨巡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용구산에서 체포된 金亨順과 동일인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김형순이 음력 12월 11일 이전에 담양의 수성군측에 의해 김문화와 같이 담양의 용귀산에서 체포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04) 그러나 이 사건의 연루자인 金亨巡은 1895년 음력 1월 22일 암행어사에 의해 다른 2명과 같이 정읍에서 붙잡혔다. 205) 이로써 볼 때, 두 사람의 동일인 여부를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용구동 출신의 농민군 지도자이며, 재판과 관련된 김형순은 용구동의 執綱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으로 보면 두 사람이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형순은 기발한 방법으로 탈옥하였다. 이상과 같이 담양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크게 보아 용구동접과 남응삼의 활동으로 집약된다. 용구동접은 지금의 용구동을 근거지삼아 김형순과 김문화의 주도로 담양지역 내에서 활동했다. 이장태 접주의 경우 대장태를 활용하여 장성 황룡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수훈을 세웠는데, 아마도 장흥의 이방언접과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담양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한편, 담양접주 남응삼은 담양 전체를 관할함과 동시에 남원의 김개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담양과 남원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담양 지역 내에 두 개 이상의 강력한 농민군 조직이 활동함으로써 약간의 알력이나 갈등 요소가 없지 않았을 것이나 특기할만한 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처럼 담양과 창평에서는 이장태를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 약 10명 내외가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고, 일반 농민군 3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처리 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담양 지역은 농민군의 활발한 활동만큼 수성군의 대응도 만만치 않아 오랜 기간 양측의 갈등과 대립이 지속된 특징을 보여주었다. 담양의 인근 곡성에서도 6월 초순 전주화약이 체결된 후 집강소 활동을 전개했으리라 믿어진다. 202) 『東學關聯判決文集』(정부기록보존소, 1994), 121쪽. 203) 『각사등록』 54, 695 723쪽. 204)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593쪽. 205) 『동학관련판결문집』, 2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