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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67 담양부 관내에서 음력 12월 4일에 체포된 농민군의 숫자는 22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183) 그 가운데 李文水 蔡大老未 張大辰 林松都는 포살되었고, 국문보·김희완은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이장태는 황룡전투에서 대장태를 활용하여 황룡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日 塒 라는 호로 더 잘 알려졌다. 184) 그는 일본군 주둔지에서 일본군에게 포살되었으며, 그의 부하 15명은 담양부에 가두어졌다가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당시, 농민군을 심문한 일본군은 이장태를 호남을 대표하는 농민군 지도자로, 국문보와 김희완은 군현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평가하였다. 185) 그리고 창평현 관내에서는 음력 12월 6일 거괴로 지칭된 한충상과, 그의 부하들로 믿어지는 白處士 曺公瑞 張永玉 河在元 金泰(奉)哲 白俊水 韓成玉 元萬石 李石用 姜判石 鄭永云 등이 체포되었다. 186) 이들에 대한 처리 결과 역시 알 수 없다. 한편, 담양 수북면 용구동과 大谷에는 농민군의 군량이 80석이나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를 담양과 순창 수성군의 군수미로 전환, 사용하였다. 187) 또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음력 12월 11일에는 용구동의 농민군 지도자 김형순과 김문화 등은 담양의 용구산에 은신중 체포되었다. 188) 용구산에는 지금도 농민군이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로 지어진 구조물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숨어 지내던 이들은 담양 수성군의 포위망이 좁혀들자 백양산으로 이동하려다가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이들중 김형순은 국홍묵의 아들 在奉 在俊 등에게 부친의 복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피살될 뻔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아 광주부 감옥에 갇혀있던 중 옥리에게 목욕물을 청하여 옥사 흙벽에 물을 발라 헐고서 탈옥했다고 한다. 189) 이밖에 담양부의 호장 엄하영, 副吏房 김인소는 나주로 압송되었는데, 농민군 진압에 비협조적이라는 점에서 의혹을 샀던 것 같다. 190) 또한 농민군이 징발한 우마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수성군이 제멋대로 사용하다가 말썽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191) 음력 12월 8일 순무영에서는 지금까지 담양에서 체포된 농민군의 규모와 신문내용을 상세하게 파악하였다. 192) 농민군을 체포, 소탕한답시고 담양에 주둔한 일본군과 관군 및 짐군 등을 합하면 무려 1천여 명이 넘었다. 193) 거기에 순창과 옥과의 수성군까지 합한다면 훨씬 많은 수가 담양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들이 자행한 농민군과 그 가족에 대한 탄압과 주민에 대한 토색질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183) 「全羅道所捉·所獲東徒成冊」, 『동학란기록』 하, 707쪽. 184)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63쪽. 185) 위의 책, 341 606쪽. 186) 「全羅道所捉 所獲東徒成冊」, 『동학란기록』 하, 707쪽. 187) 「순무선보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593쪽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16 593 615쪽. 188)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593-594쪽. 한편, 이 자료에는 창평의 龍龜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용귀산(현 용 구산, 해발 770m)은 현재의 담양 수북면에 있다. 189) 『담양 창평 한말의병사료집』, 585쪽. 190)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07 636쪽. 191) 위의 책 하, 205쪽. 192) 위의 책, 217 597쪽. 193) 위의 책, 6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