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page

6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상과 같이 담양 지역의 농민군의 활동은 대체로 남원의 김개남의 직접적인 영향과 지시아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응삼은 김개남의 최측근 인물로서, 그는 전라좌도의 전량관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약 1천명 규모의 농민군을 거느린 그는 남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크고 작은 규모의 전투에도 직접 참가하였으며, 집강소 활동기에는 대체로 온건한 활동으로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894년 음력 12월 농민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담양에도 일본군과 관군이 밀려왔다. 일본인 대위 森尾雅一과 한국인 隊官 申昌熙 吳昌成, 別軍官 李志孝 黃凡秀 李周瑞, 敎長 朴相吉 黃水玉 및 병정 150명이 들어왔다. 175) 이들은 담양 내에 숨어있는 농민군을 진압, 소탕하러 온 것이다. 이들이 담양에 주둔하자, 여태껏 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숨죽여 지내온 토착 양반과 향리들이 가장 반겼다. 음력 12월 4일경 담양에서 이른바 ‘의병’이 일어나 읍을 되찾을 때 순창과 옥과의 수성군 수백 명이 도움을 주었다. 176) 이때부터 담양에서 활동중인 농민군들은 대부분 종적을 감추었다. 대관 신창희의 관군이 담양에 주둔한 이후 접주 2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앞서 음력 11월 초순 농민군 李源之가 체포되어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177) 음력 12월 7일에는 담양의 이웃인 순창의 避老里에서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이 체포되었다. 178) 순창에서 붙잡힌 전봉준은 담양의 獄舍에 이틀동안 갇혀있다가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4월 하순 효수되었다. 담양의 수성군들은 음력 12월 11일 접주 이아무개와 국아무개를 체포하였는데, 상당한 비중을 지닌 농민군 지도자였다. 179) 일본군은 이들을 신문하여 농민군에 관한 동향 파악에 분주하였다. 당시 담양의 수성군을 주도하며 농민군을 체포한 인물은 이른바 ‘의병장’ 구상순, 守城軍統領 朴東眞 鞠致烈, 作隊別將 鞠義烈 등이었다. 180) 이들은 관군과 순창 옥과의 수성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체포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담양의 수성군들은 대체로 향리이거나 토착 양반들로 보여진다. 수성군은 최소한 300여 명이 넘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담양부에서는 구상순과 鞠仁默(前 五衛將) 金仁邵(下吏) 嚴河永(下吏)이, 창평에서는 李淇宇(幼學)가 농민군을 체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181) 구상순의 경우에는 수성군을 일으키고 농민군을 체포, 진압한 공로로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에 기록되어 있다. 182) 이들 수성군들이 바로 거괴라고 지칭되는 농민군 지도자 이장태와 鞠文甫 金喜完 등을 체포하였다. 175) 「巡撫先鋒陣謄錄」, 위의 책, 564쪽. 176) 위의 책, 568 592쪽. 177) 「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 『동학란기록』 하, 327쪽. 178) 위의 책, 574쪽. 179) 위의 책, 325 591쪽. 180) 위의 책, 592쪽. 181) 「東學黨征討人錄」, 『동학란기록』 하, 618-624쪽. 182) 「甲午軍功錄」, 위의 책, 7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