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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루는 강력한 조직이었다. 용귀동접은 현재의 담양군 수북면 주평리 일대로 추정된다. 161) 관군측의 기록에 따르면 용귀동접은 “동학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아주 적으며 끼고 도는 兇徒(농민군 : 저자주)들이 집에 들어와서는 동조자를 길러내고 나가서는 독을 뿜어냈다”고 표현될 정도였다. 이들은 용구동을 기반삼아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용구동접의 활동은 金亨順과 金文化 등이 주도하였다. 한편, 담양의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南應三은 金開南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서 활동하였다. 그는 김개남을 따라 음력 6월 25일에 남원을 점령할 때에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즉, 김개남과 남응삼, 진안출신의 李士明, 고흥출신의 柳福萬 등은 남원 출신의 金洪基 金禹則 李春宗 朴定來 朴仲來 金元錫 등과 같이 남원읍성을 점령한 것이다. 162) 이들은 남원을 기반으로 장차 운봉을 함락한 후 경상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남원은 사방으로 통하여 모여들거나 흩어지기가 편리한 곳인데다 바로 곁에 군사적 요충지인 蛟龍山城이 위치하여 정밀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63) 이들이 남원을 점령할 당시 남원부사 尹秉觀은 이미 도망하고 없었다. 따라서 김개남 등은 비교적 손쉽게 남원을 점령하였으며, 남원의 동학교인들과 농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아다시피 남원은 이미 1861년부터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포교되어 상당수의 교인이 배출되었다. 남원의 김홍기와 柳泰洪 등의 주도로 수천명의 교인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김개남의 농민군을 적극 후원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담양접주 남응삼은 김개남의 심복이었다. 興善大院君 측에서 파견한 鄭碩謨는 김개남과 남응삼의 활동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164) 다만, 남응삼이 김개남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의 과정에 대한 내용은 없다. 아마도 백산봉기 이후 서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전주화약이후에 남응삼은 김개남의 남원점령을 도움으로써 더욱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담양보다는 주로 남원에서 김개남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의 행적은 남원을 점령한 음력 6월 25일 이후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9월을 전후한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농민군들이 2차 봉기를 준비하는 것과 관련하여 주목된다고 하겠다. 당시 남응삼은 담양의 가장 대표적인 농민군 지도자였으며, 그를 따르는 농민군의 규모도 상당하여 최소한 800명은 되었던 것 같다. 165) 특히, 그는 김개남의 신임이 대단하여서 典糧官으로 활동하였다. 남응삼은 童蒙軍의 호위를 받으며 활동하였는데, 군수물자를 관장하였기 때문에 書記를 두고 있었다. 남응삼의 서기는 鞠基春(改名 鞠基淵)이었는데, 사실 그는 원래 농민군이 아니었다. 그는 담양부의 유명한 향리로 활동하다가 농민군을 돕게 된 자였다. 다시 말해 집강소시기 이후 농민군 세력이 크게 161) 『담양·창평 한말의병사료집』(담양향토문화연구회, 1997), 578·584쪽. 162) 「朴鳳陽經歷書」, 『동학란기록』 하, 511쪽. 163) 황현, 『번역 오하기문』, 227쪽. 164) 정석모, 「甲午略歷」, 『동학란기록』 상, 1971 참조. 165) 「갑오약력」, 『동학란기록』 상, 69쪽과 『번역 오하기문』, 2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