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page

동학혁명 59 해남군수에 임명될 정도였다. 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자들을 수록한 이른바 「갑오군공록」에는 나주출신들이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이 과정에서 나주성 공격을 주도했던 최경선은 지금의 화순 동복에서, 손화중은 전북 興德에서, 전봉준은 전북 순창에서 각각 체포되어 나주로 이송되었다. 처음 봉준은 이미 사로잡혀 화중과 함께 나주에 송치되었는데, 화중이 민종렬을 보고 머리를 조아리 며 자신을 ‘小人’이라고 하자, 봉준은 “뭐 소인이라고, 민종렬을 복 자신을 소인이라고 하는 너는 진 실로 짐승 같은 놈이다.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너같은 놈과 함께 일을 도모하였으니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라며 질타하였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318쪽). 나주에 압송된 전봉준과 손화중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전봉준의 호방함이 부각되어 있다. 이들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895년 음력 3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이 나주의 농민군들은 적어도 여섯 차례의 대전투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농민군이 해산된 후에도 생사가 경각에 달린 경우도 부지지수였을 것이다. 그중 羅東煥은 나주 영산포 출신의 접주였는데, 나주 공격시 선봉장으로 참전한 인물이었다. 그는 부인의 함구로 살아났으나 부인은 모진 고문을 당해 생명을 잃었다고 전한다. 152) 나주대접주였던 오권선은 주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한편, 招討營이 설치된 나주는 수많은 농민군들이 압송되어 이곳에서 처형되거나, 서울로 다시 압송되는 거점 역할을 하였다. 153) 농민군의 활동 내용이 모호하거나 크지 않은 경우에는 엄혹한 고문을 받다가 생명을 잃기도 하였으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풀려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장흥의 대접주였던 李仁煥, 사발통문의 서명자였던 黃彩五 黃洪模 宋柱玉 등도 나주에서 처형되었다. 또한 장흥의 여성농민군 지도자였던 이소사도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되었고, 화순 출신의 韓達文은 나주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자신의 구명을 부탁하는 편지를 남겼다. 애절한 사연이 담긴 편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중략)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이날 나주로 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 자 한 푼 없으니 우선 굶어 죽게 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오. 돈 300여량이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시오. (중략) 갑오년 12월 28일 達文 上書(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294쪽). 위의 내용을 보면 감옥에 갇혀 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던 것 같다. 그후 152)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290-291쪽. 153) 위의 책, 292-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