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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마름쇠를 설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다시 말해 농민군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주 서문 공방전에서 최경선이 지휘한 농민군 3천명은 아마도 오중문접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을 것이다. 2차 봉기시 오중문이 3천명을 동원했다는 점과 그가 서문 공격의 선봉을 담당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믿어진다. 그런데 집강소 시기에 오중문(權善)은 나주대접주로서 나주읍을 제외한 나주의 각 면에서 군수물자와 무기를 조달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민간에 피해를 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나주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봉준은 음력 8월 13일 수행원 10여 명과 나주목사를 방문하였다. 집강소 활동에 협조해달라는 전봉준의 요청에 민종렬은 은근히 위협을 가하며 거부하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전봉준은 영암을 다녀 올테니 일행들의 옷을 세탁해달라는 機智를 발휘하여 死地를 벗어났다. 그후 전봉준은 손화중과 최경선에게 나주의 상황을 설명하며 地利와 人和를 두루 갖춘 金城湯池이므로 나주 공격을 신중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최경선 오중문 등 광주와 나주의 농민군 지도부는 나주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민종렬 역시 대비를 철저히 하였다. 예컨대, 음력 10월에 부통장 김재환은 대완포 등이 너무 무거워 사용하기에 불편하므로 造砲車를 만들어 손쉽게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관군의 체제를 재정비한 민종렬은 같은 달 21일 광주 砧山에 주둔중인 농민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음력 11월 13일에도 농민군은 聳珍山에서 관군과 싸웠으나 별로 소득이 없었다. 농민군 지도부 역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수만명을 동원하여 16일 古幕浦에서 대회전을 벌였으나 3천여 명의 관군을 이기지 못하였다. 같은 달 24일에도 금안동 남산촌에서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농민군이 또 패배하였다. 이로써 나주 공략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의 나주 상황을 황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주목사 민종렬과 營將 李源佑가 나주성을 지키고 적(동학농민군-저자주)을 물리쳤다. (중략) 적들 은 큰소리치기를, “관리들은 믿을 만하지 못하고, 온 나라에 큰 난리가 났으니, 우리들이 응당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며 보국안민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대포와 군마를 거두어들 이고, 돈과 양식을 나누어 주며,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하니, 난민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천리가 온 통 호응하였다. (중략) 적도가 나주로 향하자 민종렬은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독려하여 성을 지 킬 계책을 세웠다. (중략) 적도가 분히 여겨 누차 침범하였으나 모두 패하고 감히 다시는 성을 공격하 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킨 것은 한 성에 그쳤고 성 밖의 참상은 다른 곳에 비해 더욱 심하였다(임형택 외 옮김, 『매천야록』 상, 문학과지성사, 391쪽).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농민군은 여러 차례 나주성을 공략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나주성을 제외한 인근 지역에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11월 이후 농민군의 전세가 급격히 기울자, 나주의 농민군은 제각각 살 길을 도모해야 했다. 반면, 나주성을 지킨 나주목사 민종렬과 도통장 정석진을 비롯한 20여 명이 포상을 받았는데, 정석진은 그 공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