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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57 나주성을 끝내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이제 나주성을 두고 공방전을 전개한 나주지역의 농민군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주는 집강소 시기이후 농민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 지역이었다. 나주목사 閔種烈이 유림과 향리들의 지원을 받아 나주성을 굳게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백산대회 당시 나주에서는 吳中文과 전유창이 농민군을 이끌고 참가했는데, 이들이 남하하여 나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민종렬이 굳게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오중문 등은 나주의 외곽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49) 백산대회직후 전봉준이 남하하면서 함평에서 나주목사 민종렬에게 편지를 보내어 농민군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으나 불응하였다. 150) 이때 전봉준은 주력 농민군을 이끌고 장성으로 진군하면서 최경선으로 하여금 일부 병력을 이끌고 나주를 공격케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농민군이 나주성을 점령하기 어려운 배경은 지리적 조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주성의 서북쪽에는 錦城山이 거대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고 남동쪽은 영산강이 휘감아 돌면서 거대한 垓字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나주성에는 인근 12개 군현을 관장하는 牧이었으므로 창검을 비롯한 대포와 천보총 등 각종 무기를 구비하고 있었으며 전라병사가 강진 등에서 징발한 포군 250명이 나주에 포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보잘 것 없는 무기로 무장한 농민군이 나주성을 점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농민군 입장에서는 나주를 반드시 장악해야 만 했다. 후방에서 침투를 노리는 일본군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통의 요충지인 까닭에 현재 전라남도의 각 군현과 연락하기 위해서는 나주를 수중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나주성 점령은 인근 지역의 장악과 폐정개혁의 추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농민군 지도부는 전봉준의 심복이었던 최경선을 광주에 파견하여 나주성 공격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하여 최경선은 나주의 오중문을 비롯하여 장흥의 이방언, 함평의 이화진, 무안의 배규인, 담양의 鞠文甫 등과 함께 나주성 공격에 나섰다. 당시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부가 나주성 공격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주 인근에서 활동하는 대접주급 농민군 지도자들을 총동원하여 나주 공략에 나섰던 것이다. 두 번째 나주공격은 음력 7월 1일 시작되었다. 최경선은 3천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현재의 노안면 금안동 부근에 진을 치고 기세를 올리다가 5일 밤 나주 서문을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당시 나주성을 굳게 지킨 관군과 수성군들은 농민군을 “나무 허수아비나 풀로 만든 인형”에 불과하다고 평하였다.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은 鄭錫珍을 都統將, 金在煥을 副統將, 孫商文을 都衛將, 金聲振을 中軍將, 金蒼均을 統察로 임명하였다. 또한 朴根郁 文洛三 朴允七을 別將으로 임명하여 각각 서문 북문 동문을 지키게 하였다. 151) 이들은 대부분 나주의 향리들이었는데, 포군과 장정들을 지휘하며 성첩을 보수하는 한편, 낮에는 사격술을 연마시키고 밤에는 불을 멀리 밝히는 법과 149)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0쪽. 150) 李炳壽, 「錦城正義錄」 甲編, 『(국역) 금성정의록』(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 1991), 41쪽. 151) 위의 책, 40쪽. 이하 내용은 『금성정의록』에 의거하여 정리했으므로 각주를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