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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무안은 매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本邑(무안현-저자주)은 멀리 떨어진 해안에 위치해 있으므로 교화의 은택이 널리 미치지 못한 상황 일 즈음 동학의 무리들이 창궐하자 동학에 가담하게 된 것을 요행으로 여겼고, 즐겨 추종하는 자들은 이때를 틈타 아주 혼란스럽고 문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 평민으로 동학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매우 드물었다(「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 『동학란기록』 하, 328쪽). 무안에서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크게 신장되었고, 특히 평민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호시절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재봉기를 준비하라는 동원령이 내리자, 배규인을 중심으로 2천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하지만 이들이 삼례역으로 북상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후 주력 농민군의 패배가 거듭되면서 무안에도 관군이 들이닥쳤다. 음력 12월 11일 늦은 오후에 좌선봉진은 무안에 주둔하는 것을 시작으로 살벌한 검거선풍과 참혹한 주검들이 쌓여갔던 것이다. 137) 당시 이들은 수성군을 편성하여 각 면을 돌며 접주 70여 명을 체포했지만, 아직도 체포망을 벗어난 농민군 지도자가 많다고 하였다. 그 가운데 30여 명을 죽이고 40여 명을 가두었다. 이들 중 裵相玉과 裵奎瓚 형제는 무안뿐만 아니라 전라하도 연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인물로 평하였다. 이때 관군은 배상옥을 놓치고 배규찬을 체포하여 軍民을 모아놓고 효수하였다.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9명을 차례로 총살하였고 나머지는 가두고서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후 24일 裵奎仁 138) 역시 해남에서 尹奎龍 등에 의해 체포당해 일본군에 인계되었다. 139) 당시 해남은 무안과 장흥의 농민군과 연계되어 왕래가 활발한 편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배규인은 해남으로 들어가 암중모색을 하던 중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 외에도 음력 12월 8일 무안접의 우두머리 裵正圭 朴順西는 체포되어 즉시 포살되었고, 농민군 徐汝七 등 6명은 활동의 경중에 따라 처리될 상황이었다. 9일에도 농민군 18명이 체포되었는데, ‘거괴’로 지칭된 金應文 金子文 鄭汝三 金汝正 張用辰 趙德根은 심문후 죽임을 당했으며, 나머지 12명은 활동의 경중에 따라 처분될 예정이었다. 140) 이처럼 무안지역 농민군은 배규인을 비롯하여 약 100명 정도 체포되었음이 확인된다. 배규인 형제를 중심으로 무안뿐만 아니라 함평 해남까지 이들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체포된 무안의 농민군 지도자중 약 40명이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는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이곳에서도 경군의 작폐는 물론이거니와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핑계로 수성군과 민병, 심지어 보부상까지 나서 주민들을 괴롭혔다. 또한 억울하게 붙잡혀 갖은 137) 위의 책, 604-605쪽. 138) 배규인은 배상옥과 동일인물로서 규인은 譜名이고 상옥은 字일 것이다. 139)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40쪽. 140)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동학란기록』 하, 7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