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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53 음력 12월 4일 정오경 관군은 그를 손화중의 棍杖手 丁正七과 장성 鵝谷에서 붙잡은 李奉學 등과 함께 장성 장터에서 주민을 모아놓고 효수하였다. 129)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농민군의 체포가 지지부진하였다. 그것은 관군의 민폐가 심하여 주민들의 협조를 얻기가 어려운 탓이었을 것이다. 130) 그도 여의치 않자, 장성부에서는 은신한 농민군 지도자들이 변성명하고 숨었을 것이니 한 사람도 놓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131) 결국 같은 달 19일에는 북일면 錦谷接主 韓德一과 金士文 등이 체포되었다. 132) 같은 달 27일 장날 주민들을 모아놓고 장성읍 농민군 지도자 姜日陰을 효수하였다. 그의 ‘죄목’은 읍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官長을 위협하고 무기를 빼앗아 민간의 錢穀을 약탈했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관군은 孫宜榮 등 10명을 처형한 후 해를 넘긴 1895년 음력 1월 2일 주민들에게 그들의 활동사항을 알려 경고하였다. 이를 테면 손의영은 농민군을 모아 기포하여 민재를 빼앗았다는 것, 鄭夏杓는 접사로 민폐를 끼쳤다는 것, 강일음의 동생 姜有陰은 접사로서 형을 빙자하여 행패를 부렸다는 것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장성의 농민군 지도자들이었는데, 주로 접주와 接司·接率의 직책으로 활동했으며, 일부는 인근 지역인 정읍의 접주로 활약하였다. 133) 그중 접솔은 접주와 유사한 직책이 아닐까 한다. 같은 혐의로 장성의 농민군 지도자 孔基魯 등 8명은 신임 부사가 도임한 날 체포되었다. 음력 1월 2일 관군은 장성 장날 주민들을 모아놓고 공기로 金宗益 두사람을 효수하고 李基周 등 6명도 처형 134) 했는데, 이를 통해 주민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농민군 申石萬은 같은 달 12일에 체포되어 右鎭營으로 압송되었다. 135) 이처럼 장성에서는 농민군 지도자 약 2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다. 타 군현에 비해 비교적 피해가 적은 편인데, 그것은 주민들의 비협조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장성은 현재의 전남-전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여서 관군뿐만 아니라 別軍官이나 民保, 義兵을 자칭하는 무리들이 농민군 수색을 빌미로 주민들을 토색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거나 심지어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경우도 많았다. 136)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거나 억울한 피해를 당한 주민들이 농민군 체포에 협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장성은 타 지역에 비해 농민군 활동이 왕성하였지만 피해는 비교적 적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제 무안의 상황을 알아보기로 하자. 백산대회이후 농민군의 세력이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자, 129) 위의 책, 568쪽. 130) 위의 책, 564-565쪽. 131) 위의 책, 575-576쪽. 132) 위의 책, 613쪽. 『봉남일기』에는 이들이 같은 달 10일에 체포된 것으로 전하는데, 이들은 14일 처형되었다고 한다. 133) 위의 책, 651쪽. 『봉남일기』에 의하면, 강일음은 강계중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참수되었으며 나머지 16명은 총살되 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무선봉진등록」과 숫자상 약간 차이가 있다. 134) 위의 책, 650쪽. 『봉남일기』에 의하면, 공기로는 공치환과 형제이고 공기로는 참수되고 공치환 등 6명은 총살된 후 불태 워졌다고 한다. 135)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동학란기록』 하, 710쪽. 136)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73-6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