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page

5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위의 표에 보이듯이, 광주-전남에서는 11개 군현에서 약 36,000명이 전봉준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각 군현의 읍에 주둔하였다. 이 가운데 함평의 李OO는 아마도 앞서 함평편에서 보았던 이화진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함평의 ‘거괴’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함평의 농민군을 지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백산대회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로서 동원령에 호응하였다는 점이 다소 이색적이라 생각된다. 또한 나주의 오권선이 나주읍에 3천명을 거느리고 나주읍에 주둔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를 것이다. 당시 나주는 농민군의 통제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남의 김병태는 백산대회 당시에는 강진의 두령으로 서술된 바 있다. 강진과 해남은 인접 군현이어서 상호 왕래가 잦은 편인데, 그로 인해 해남의 농민군을 이끌 수도 있지만 오지영의 誤記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동원된 규모 역시 2,000-5,000명으로 단순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숫자는 농민군 지도부에서 해당 지역에 할당한 규모가 아닐까 한다. 오지영은 당시 농민군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동원된 숫자라기보다는 자신들이 할당한 규모를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다소 문제가 없지 않지만, 125) 이들이 각자의 군현을 중심으로 군사활동을 위한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장성에서는 기우선을 중심으로 동원령 체제에 부응한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이 집강소이후부터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집강소 시기에 장성도호부를 지낸 閔尙鎬는 음력 3월에 부임했다가 그해 9월에 농민군 활동과 관련하여 파면당한 점으로 보아 농민군에 다소 우호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의 파면으로 인해 장성은 4개월동안 수령의 공백상태였다. 126) 이러한 연유인지 고창의 농민군이 장성에서 활동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고창접 1천여 명이 황룡장에 주둔하며 활동하였으며, 정읍의 농민군도 자주 내왕하였다. 127) 따라서 이 시기에는 장성 농민군이 치안을 유지하는 등 집강소 활동을 펼쳤을 것이다. 그후 농민군이 수세에 몰리면서 장성에서도 농민군의 피해가 속출하였다. 당시 농민군 진압에 앞장선 양호선봉장 李圭泰가 남긴 「巡撫先鋒陣謄錄」과 장성출신의 邊萬基(1858-1925)가 남긴 『鳳南日記』를 중심으로 장성의 피해상황을 서술하고자 한다. 장성부사의 장기 공백으로 장성은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동면 용두리는 농민군 근거지로 지목될 정도였다. 128) 인근 지역인 정읍과 고창의 농민군도 장성에서 활동했는데, 손화중의 일가인 孫德秀는 정읍의 농민군 지도자로서 용이 그려진 큰 깃발과 손깃발 1개씩을 소지하고 있었다. 125) 필자미상의 『天道敎書』(1920)의 「제2편 海月神師」에서는 광주-전남의 17개 군현에서 63명의 농민군 지도자가 삼례역 에 집결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삼례역 집결 여부는 각 군현별 정리에서 다루지만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오지영의 서술대로 각자의 군현에 농민군 동원령을 내렸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삼례역에 집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126)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04-605쪽 ;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209쪽. 127) 변만기, 『봉남일기』, 「갑오 10월 28 29」 「갑오 11월 15일」. 128)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