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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51 朴俊尙은 永村面 飛化洞 출신으로, 이화진으로부터 동학에 입교하였다. 또한 金奉圭는 수성군에 체포되어 워낙 심하게 매를 맞고 고문을 받아 중상을 당해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이들은 이화진의 휘하에서 나주와 무안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해를 넘겨 1895년 정월 19일에 徐右順 등 10명, 洪坤三 등 11명이 붙잡혀 나주의 우진영으로 압송 122) 되어 엄한 조사를 받았으나, 그후 이들이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이처럼 수많은 농민군들이 희생되는 과정에서도 더욱 엄한 지시가 내려졌다. 123) 즉, 유명 ‘거괴’와 접주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도 변성명하고 마을과 바닷가에 숨었으므로 한사람도 빠짐없이 색출할 것과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엄히 다스릴 것, 그리고 함평현감과 吏校들은 9개월 동안 활동한 농민군 지도자들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옥석을 구분하거나 사정을 살필 것 없이 해당 지역을 모조리 불태우라는 것이다. 아울러 공로를 세운 자들에게는 포상을 할 것이니 한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농민군 진압에 앞장선 선봉진에서는 한문과 한글로 각각 게시하여 독려했음은 물론이다. 결국 함평의 농민군은 대접주 이화진을 비롯하여 접주급만 약 30명이 희생되었으며, 일반 농민군 20여 명이 체포되어 험난한 취조과정 중에 죽임을 당하거나 생사여부조차 알 수 없는 처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장성의 농민군 상황은 어떠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1894년 가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후 조선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불응하자, 일본은 경복궁을 불법적으로 침범하여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전봉준 등은 군사를 일으켜 일본세력을 몰아내기로 결정하면서 전라도 전체 농민군의 동원령을 내렸던 것이다. 전봉준의 지시에 호응하여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농민군을 각 군현에 집결시켰는데, 당시 농민군을 징발한 군현은 다음과 같다. <표> 1894년 제2차 봉기시 농민군을 동원한 군현 124) (* 백산대회에 참여한 농민군 지도자) 122)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동학란기록』 하, 711쪽. 123) 위의 책, 595쪽. 124) 오지영, 『동학사』, 482-483쪽. 군현명 농민군 지도자 규모 군현명 농민군 지도자 규모 장흥 李邦彦* 5,000 순천 朴洛陽* 5,000 해남(강진?) 金炳泰* 3,000 흥양(고흥) 柳希道* 3,000 무안 裵圭仁* 2,000 보성 文章衡* 3,000 장성 奇宇善* 3,000 광주 朴成東* 4,000 나주 吳勸善* 3,000 담양 金重華* 3,000 함평 李OO(이화진)* 2,000 (11개 군현) (3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