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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49 다음날 돌아오던 중 수성군에 붙잡혀 이화진 등 14명은 체포 즉시 포살되었고, 서우순 등 6명은 체포되어 엄한 취조와 고문을 당한 끝에 金奉圭는 수성군의 매질을 견디지 못해 음식을 삼킬 수 없을 정도의 중태에 빠져 결국 숨지고 말았다. 나머지 5명의 생사는 잘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들도 대부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영광은 고부 무장 부안을 비롯하여 광주 담양 장흥 무안 함평 동복 고흥 장성에 비견될 정도로 ‘동학의 大窟穴’이라 지칭되었다. 108) 영광의 농민군 가운데 일부는 무장의 농민군들과 같이 진도까지 진출하여 鳥島面 농민군 지도자 朴仲辰의 주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바 있었다. 109) 이처럼 전남 서부지역에서 무장 함평과 연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수세에 몰리던 음력 12월에서 다음해 1월 사이에 이들은 대체로 수성군이나 관군에게 체포, 죽임을 당하였다. 영광에서는 약 50명의 농민군 지도자와 농민군들이 희생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중 농민군 지도자였던 사람들은 효수를 당하기도 했으며, 일부 지도자들은 한 목숨 살겠다고 동료들을 배반하였다가 함께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겨우 살아난 농민군들은 대체로 다른 지역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바꾸고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보인다. 110) 이처럼 집강소 설치이후 영광의 농민군 활동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8천명 규모의 농민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활동하였다. 집강소 시기이후에도 함평 동학농민군의 교세는 강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농민군이 패퇴할 무렵인 ‘음력 11월 22일 함평장날 장사꾼은 초저녁 별처럼 드문데 농민군은 운집하여 살벌한 분위기’였다는 기록이 있다. 111) 당시까지도 함평에서는 대접주 李化辰을 비롯하여 金京五 등 수많은 접주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12) 그중 이화진은 제2차 봉기 당시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 집결했다가 나주공략을 위해 회군하여 활동 113) 하다가 음력 12월 5일 김경오 등과 같이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화진(1861-1894)은 孫佛面 竹長里 당골 출신으로, 본명은 景鎭, 호는 斗庵이었다. 114) 張玉三(1851-1895)은 新光面 沙川里 출신인데, 이화진의 권유로 농민군에 가담하였다. 115) 그런데 그는 이화진의 매부였는데, 그의 형인 張京三(1842-1894)과 동생인 張公三(1854-1895) 3형제가 참여하여 농민군의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116) 장경삼이 살았던 쾌치마을 앞 삼정들에서 농민군을 조련한 것으로 전해진다. 함평읍 출신의 李泰亨(1841-1894)은 자가 相三으로 1888년 무과에 급제한 후 군산첨사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화진과 더불어 함평의 농민군을 주도하였는데, 고창 현감을 역임한 이진구의 108) 「李圭泰往復書並 墓誌銘」, 『동학란기록』 하, 503-504쪽. 109)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16쪽. 110) 위의 책, 581쪽. 당시 영광군수의 첩보에 의하면, 이름을 변경한 各處의 접주들을 엄히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있다. 111)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185쪽. 112)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573 583 627쪽. 113)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181쪽. 114) 최현식, 『증보 갑오동학혁명사』, 266쪽. 115)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181쪽. 116) 최현식, 앞의 책, 263 2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