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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순서는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광주-전남 서부 군현부터 시작할 것이다. 1. 전남 서부지역 농민군의 활동과 피해 현황 이미 거센 바람을 일으켰던 제1차 동학농민혁명기 영광 지역 농민군의 활동과는 달리 집강소 시기의 활동을 찾을 수 없다. 즉, 1894년 6-9월 사이 영광 농민군의 동향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10월 전봉준의 재기포 통문이 도착하자 영광에서는 吳河泳 吳時泳 등이 8천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영광읍에 주둔하였다. 101) 오하영 등은 이들을 이끌고 제2차 봉기의 집결지인 삼례로 갔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대부분의 농민군은 북상하고 일부는 잔류하여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중 일부는 음력 11월부터 수세에 몰리다가 다음달 초부터 수성군이나 관군에 의해 연이어 체포되었다. 예컨대, 음력 11월 20일 영광군의 吏校들이 농민군을 타도할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東部面의 농민군 지도자 梁京洙가 영광읍성을 점령한 후 연루자들을 죽이고, 그 집을 부수어버렸다. 하지만 음력 12월 3일 영광읍의 진사 金應善 등이 吏校 明修와 더불어 수성군을 조직하여 상당수의 농민군을 체포했는데, 이때 양경수도 체포되어 죽임을 당해 효수되었다. 같은 날 弘農面 출신의 宋文洙 역시 같은 면의 李玄淑이 이끄는 수성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다. 그런데 이현숙은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했으나 세가 불리해지자 배신하여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이었다. 그 역시 김응선에 의해 농민군 활동이 드러나 체포 102) 되었는데, 그 역시 효수되었음이 확인된다. 103) 그리고 영광의 농민군 지도자중의 한사람인 吳泰淑 역시 음력 12월 5일 효수되었으며, 崔俊淑 등 9명도 체포되어 포살되었고, 朴仁之 등 10명은 붙잡혀서 壯衛營 隊官에게 보내졌으나 생사여부는 알 수 없다. 104) 또한 음력 12월 12일 무장에서 체포된 영광출신의 농민군 宋辰八 등 18명은 영광으로 압송되어 활동의 경중에 따라 처벌당하였다. 105) 1895년 음력 1월 20일, 법성진의 농민군이었던 南宮達과 朴卜巖은 나주의 右鎭營으로 압송당했고, 농민군 지도자인 吳弘順 李萬順 金豊宗도 체포되어 엄한 조사를 받았다. 106) 한편, 道內面 古城里에 살던 徐佑順은 음력 10월에 무장현 長才面 南溪里의 吳應文에게 동학을 전수받고 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음력 12월 5일 체포되었다. 107) 그는 함평 孫佛面 출신의 李化辰과 姨從間이어서 이화진이 기포할 때 동참해서 나주 공격에 가담하기도 하고 같은 달 3일 무안에 갔다가 101) 오지영, 『동학사』, 482쪽. 102) 「巡撫先鋒陣謄錄」, 『동학란기록』 상, 621쪽. 103) 이현숙이 법성포 진리였다가 동학에 입교하여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했으나, 송문수를 체포하고 오시영을 붙잡은 공로로 선봉진 별군관으로 차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152쪽). 하지만 그가 포상받았다는 설 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04) 「全羅道所捉 所獲東徒成冊」, 『동학란기록』 하, 708쪽. 105) 위의 책, 709쪽. 106) 위의 책, 711쪽. 107) 「巡撫先鋒陣謄錄」, 『동학란기록』 상, 6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