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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47 전주화약이 체결되자, 무장기포 이후 각 군현에서 달려온 농민군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치안과 행정이 거의 마비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전라감사 金鶴鎭은 전봉준과 官民相和策을 협의하여 마침내 각 군현마다 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93) 전봉준은 집강소의 총본부인 전라좌우도 大都所를 전주 감영에 설치하고 그의 비서 宋喜玉을 전라좌우도 도집강에 임명하였다. 각 군현의 치안유지와 폐정개혁의 추진은 해당 군현의 집강소나 都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94) 그리하여 농민군 중심의 개혁운동은 각 군현 단위의 집강소나 도소를 중심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그런데 집강소의 최우선 임무는 치안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으며, 폐정개혁의 추진은 다음 순서였다. 95) 이를 위해 전봉준은 집강소의 해야 할 일 4가지를 적시하여 지시하였다. 96) 첫째 각 접주는 거두어들인 무기류의 규모와 소지자의 성명과 거주지를 파악한 문서 2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관청에 보내고 나머니 한부는 보관할 것, 둘째 징발한 마필은 소유주에게 반환할 것, 셋째 향후 무기와 마필의 징발을 일체 금지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은 자는 군율로 처벌할 것, 넷째 남의 무덤을 파헤쳐 사채를 받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고 이를 어긴 자는 처벌할 것 등이었다. 감영에 위치한 대도소에서 지시한 대로 각 군현의 집강들은 해당 접주와 상의하여 농민군 보유 무기와 장비의 파악, 농민군의 약탈과 토색 금지, 民訴 등을 해결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전주 감영의 도집강에게 보고하였다. 97) 이러한 집강의 활동은 지방관의 임무에 비교될 정도였다. 98) 다시 말해 각 군현의 집강은 폐정개혁을 실행하는 주체로서 활약하였는데, 수 명의 실무진을 두고서 민간의 訴狀이나 폐정개혁의 추진뿐만 아니라 동학의 포교도 담당하였다. 99) 물론 동학 교단의 6임 중의 하나인 집강의 소임은 포교조직과 관련하여 기율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이 외에도 집강소의 몇몇 직책이 있었는데, 예컨대 接司는 접주의 명령을 받아 실행하는 집강소의 행정을 담당했으며, 省察은 치안이나 순찰 임무, 童蒙은 주로 청소년으로 구성되어 전령과 연락, 호위를 담당하거나 성찰의 보조 역할을 맡았다. 100) 하지만 이러한 집강소 활동은 각 군현에서 활동하는 농민군 세력의 강약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예를 들면 농민군 세력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폐정개혁을 활발하게 추진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은 치안유지 활동조차 버거웠다. 또한 광주-전남 지역중 나주는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제 각 군현에서 활동한 집강소와 그 이후 농민군의 동향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93) 정석모, 「甲午略歷」, 『동학란기록』 상, 65쪽. 94) 이광린·신용하 편, 앞의 책, 140쪽. 95) 김양식, 「관민합치, 전주 대도소와 집강소」, 『동학농민혁명과 전북』(전주시 전주역사박물관, 2014), 122쪽. 96) 위의 책, 122-123쪽. 97) 노용필, 「동학농민군의 집강소에 대한 일고찰」(『역사학보』 133, 1992.3), 103·117∼119쪽. 98) 황현, 『번역 오하기문』, 129쪽. 99) 오지영, 『동학사』, 476∼477쪽. 100) 김양식, 「1894년 농민군 都所의 조직」, 『사학지』 28(단국대, 1995), 374∼3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