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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것이다. 즉, 백산대회에는 함평 화순 광양을 제외한 광주-전남 대부분의 군현에서 참여하였다. 1개 군현당 1-2명에서 최대 15명의 농민군 지도자가 농민군을 이끌고 참가한 것이다. 다만, 이들이 전봉준의 주력 농민군과 함께 활동한 자취를 찾기가 어려운데, 장흥의 농민군 지도자 이방언의 농민군 부대가 장성 황룡싸움에서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들의 활동은 집강소 설치이후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므로 장을 달리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제3장 폐정개혁운동과 제2차 동학농민혁명의 지역별 전개 장성 황룡싸움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농민군은 음력 4월 24일 노령을 넘어 전북 정읍으로 진군하였다. 정읍을 출발하여 원평에서 서울에서 온 勞問宣傳官 이주효와 하인 2명을 체포했는데, 앞서 綸音宣諭從事로 활동하다가 붙잡힌 李斅應과 裵垠煥 등 5명을 처단하였다. 91) 그후 이들은 금구를 거쳐 전주에 다다라 전주성을 공격하였다. 이미 수백명의 농민군을 상인으로 위장하여 성 안에 들어와 있던 터라 손쉽게 함락하였던 것이다. 음력 4월 27일(양 5.31)의 일이었다. 농민군이 백산에서 집결하여 본격적인 항쟁에 나선지 약 한달만에 전라도의 首府인 전주를 함락시킨 것이다. 그보다 하루 늦은 28일 홍계훈은 경군을 이끌고 전주에 도착했으나, 이미 전주성은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다. 경군과 농민군은 음력 5월 3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경군은 전주성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 소식에 가장 당황한 세력은 조선 왕실과 중앙 정부였다. 결국 청나라에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청국은 6월 초 군함 2척과 약 3,000명의 군인을 조선에 파견하였으며, 일본 역시 곧바로 9,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바야흐로 조선의 내정문제가 청일양국의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청일 양국 군대의 개입은 농민군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 정부는 더욱 부담스러운 문제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군과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농민군과 휴전을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결국 전라관찰사 金鶴鎭을 새로이 임명하여 농민군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마침내 음력 5월 7일(양 6.11), 김학진의 중재안을 홍계훈과 농민군 지도부가 수용하였다. 즉, 관군은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는 勿侵標를 제공한 대신에,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되 폐정개혁안 27개조를 제출하여 수락받은 것이다. 당시 농민군의 요구조건은 크게 정치와 경제 두 분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매관매직 행위의 근절이었다. 후자는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라는 것과 외국인의 상행위 금지와 미곡의 국외반출 금지 등이 주요한 조건이었다. 또한 전운사와 균전사의 혁파, 동학교조의 伸寃, 電報局의 혁파 등을 내세웠다. 92) 91)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66쪽 ;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119 212쪽 ; 같은 책 3(2008), 135쪽. 92) 위의 책, 136∼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