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page

4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방언을 이장태라는 별호로 불리게 된 것인지, 그 대장태를 고안한 이방언의 부하의 별호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관변 및 일본측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담양출신의 이장태가 이방언의 휘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한다. 요컨대, 竹匠인 담양 출신 이 아무개가 이방언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 대장태전술을 고안하자 이방언이 그것을 적극 채택하여 황룡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편, 홍계훈은 황토재싸움이후 돌연 전라우도를 순회한 전봉준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었음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당시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부는 사기가 크게 떨어진 경군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황토재 승리직후 전주성 공격을 유보한 채 유인전술을 구사하며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의 피로도를 높여 지치게 만들었다. 전봉준 등은 오합지졸과 다름없는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흥덕 무장 영광 함평 장성을 순회하며 억울하게 갇힌 죄수들을 방면하여 가는 곳마다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軍器와 軍糧 그리고 馬草 등을 확보하여 진법훈련을 통해 군대의 모습을 갖추어 일전을 불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 것이다. 또한 동학 경문의 외우게 함으로써 인간의 도리와 평등사상을 주입시켜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농민군의 역량이 크게 신장되자,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전주성 공격에 앞서 실전을 통해 농민군의 투쟁역량을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들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의 전략으로 삼았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부득한 경우 싸움을 하게 되면 반드시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때마침 이학승이 이끄는 경군을 장성 인근에서 만나게 되었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농민군 지도부는 지금까지 준비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 보이는 戰果는 다소 과장된 것이지만 그러나 최신 무기로 무장한 300명의 경군이 오합지졸이라 믿었던 농민군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진 점은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승리를 거둔 농민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충천하였으며, 장성 황룡싸움은 곧 전주성 점령의 전초전으로서의 각별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농민군 모두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값진 승리였다. 반면,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농민군 지도부의 유인전략에 농락당해 전라도 500리길을 헤매며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결국 전라감영인 전주성을 농민군에게 헌납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장흥의 이방언이 이끄는 농민군은 결정적 수훈을 세운 것이라 하겠다. 장흥에 인접한 보성의 경우에도 1891년에 동학을 수용하였다. 이때 보성출신 廉鉉斗가 동학에 입교한 것이다. 81) 그 연원관계는 불확실하지만 아마도 장흥으로부터 동학을 전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동학은 보성에 급속히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 2년 후인 1893년 음력 4월 보성 松谷面의 執綱 梁 某가 邪學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음을 전하고 있다. 82) 여기서 邪學은 동학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보성군수가 송곡면에 보낸 牒呈에, ‘동학의 무리들이 모이는 81) 李敦化 편, 『천도교창건록』, 601쪽. 82) 「고문서 1893년 4월 8일자」, 서울대 규장각 소장(문서번호 122131) ;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38쪽에서 재인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