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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41 증가하는 교세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조처를 강구하였다. 즉, 1891년 음력 5월경 六任制를 부활하였으며, 전라도 동학 조직을 관리하는 便義長制를 신설하였다. 그리하여 호남 좌우도의 편의장에 천민출신인 南啓天을 임명하였다. 이러한 교단 조직을 중심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893년 음력 3월의 보은취회에 장흥의 동학교인 수십명이 참여하였다. 79) 이후 장흥에서는 더욱 많은 농민들이 동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믿어진다. 무장기포이후 장흥에서는 이방언 이인환 姜琫秀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에 집결하였다. 80) 이 가운데 이방언의 행적은 장성 황룡싸움에서 확인된다. 先是 義軍이 靈光郡에서 一半은 南으로 咸平地界로 달아나는 形狀을 보이고 一半은 슬슬 흩어져 四 面으로 자취를 감춰 乃終 靈光邑 東便 山谷間 길로 들어서 바로 長城邑 地界를 넘어 將次 全州로 向 하고자 할 즈음 忽然 前面에 一隊의 兵丁이 앞길을 막는지라 그는 어떠한 兵丁이냐 하면 洪將(홍계 훈-저자주)의 部下 領官 李▣▣(學承-저자주)의 領率로 義軍의 一面을 막고자 오던 軍兵이라 長城 邑에서 西南便으로 대략 十餘里나 되는 黃龍江가 벌판에서 義軍과 官兵은 서로 만나 接戰이 되었었 다. 兩陣이 서로 만나 싸움이 뒤섞어지자 忽然 義陣中에서 數十臺의 대장태가 西南山坊으로 실▣▣ ▣▣리 밀며 官兵의 턱밑까지 들어오며 총알이 雨雹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先頭에선 官兵 數十名이 거꾸러지는 지라. 이것을 본 官兵들은 크게 놀라 東南便 山谷으로 모두 逃亡하였다. 義軍은 勝勢를 얻어 數百名의 官兵을 一時에 추살하여 洋銃 數百柄과 大砲 數柄을 거두어가지고 바로 長城 갈재(蘆 嶺)를 넘어 不過 數日에 全州城에 到達하였었다(대장태라는 것은 靑竹으로써 얽어 닭의 장태와 같이 만든 것인데 그 장태 밑에는 수레바퀴를 만들어 붙인 것이오, 장태 속에서는 고동을 들어가게 된 것 이다. 이것은 長興接主 李邦彦의 部下에서 어느 사람이 만들어 내놓은 것이라 하여 別號를 李장태라 고 하니라). 且說 洪將이 康津地方에서 捷書를 올리고 凱歌를 부르면서 意氣揚揚하여 傍若無人으로 모든 行惡 을 다하면서 全州 本陣으로 몰아오던 次 忽然 中途에서 李領官의 部下 敗軍殘黨을 만나 傳하는 말을 들었다. 某日頃 一隊가 長城邑을 지나 黃龍江 가에 이르자 東學軍 一隊와 만나 싸우다가 官兵이 敗하 여 數百名의 軍士가 다 죽고 洋銃 多數와 大砲 二門을 빼앗기고 略干 남은 軍士 逃亡하여 온 말이며 東學軍은 그 길로 바로 全州 方面으로 向하여 갔다 하는 지라. 洪將은 그제야 東學軍의 計策에 빠진 줄을 알았었다. 五百里나 되는 먼 길에 誘引를 當하였음을 嗟歎不已하더라(오지영, 『동학사』, 470- 471쪽). 이미 앞서 언급한 장성 황룡싸움에 이방언의 농민군이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이방언의 부하가 만든 대장태 수십대를 동원한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음도 확인된다. 여기서 79) 위의 책, 393쪽. 80) 오지영, 『동학사』, 4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