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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잘 알 수 없으나, 해남에서는 金道一 金春斗가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대회에 참여하였다. 74) 하지만 이들 역시 전주성 점령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행적을 찾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해남의 남쪽에 자리한 진도의 경우, 1892년 1월 진도에 처음 동학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 75) 되는데, 그 이후 동학교인이 급속히 증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진도에서는 羅致炫 羅奉益 梁順達 李文奎 許暎才 등이 보은취회에 참여하였다. 76) 당시 진도에서 충북 보은까지 가는 여로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짐작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동참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다만, 이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어 유감스러울 뿐이다. 한편, 1890년대 초부터 장흥을 비롯한 전남 남부지역의 군현에도 동학의 바람이 거세었다. 다음의 기록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布德 32년(1891) 辛卯에 本郡 李仁煥 李邦彦 文南澤 諸氏가 敎門에 入하다. 是時에 長興 寶城 康津 莞島 各郡에 布德이 大振하여 信徒가 數萬에 달하다(『천도교회월보』 163, 1924년 4월호, 47쪽). 1891년 장흥의 이인환 이방언 문남택 등이 동학을 수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장흥 보성 강진 완도 등 전남 남부 연해지역까지 동학이 널리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강진의 金光泰, 보성의 廉鉉斗 등도 1891년에 入道한 점 77) 으로 보아 이 시기에 동학이 집중적으로 확산되었던 것 같다. 이 가운데 장흥의 경우 현재의 용산면 묵촌의 이방언접(어산접), 부산면 용계의 이사경접(용반접), 당시 장흥에 속한 웅치의 구교철접(웅치접), 대덕면 대흥의 이인환접, 관산읍 고읍의 김학삼접은 최초의 동학 포교와 연관되었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장흥동학이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리라 믿어진다. 이방언 등은 젊은 시절 성리학을 수학했음에도 조선의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였고, 농민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안민적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들의 동학 수용을 달가워하지 않은 계층도 적지 않았다. 특히, 유학자들은 성리학에 더욱 정진할 것을 서로 격려하고 다짐하였다. 예컨대, 강진향교의 掌議인 吾南 金漢燮과 강진 유생인 日史 朴冀鉉은 장흥 강진에 확산되는 동학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78) 이들은 동학에 적극 대처하는 방안으로 강진향교와 더불어 향약계를 조직하였다. 한편으로 김한섭은 동문수학하였던 장흥의 이방언에게 동학을 그만두라고 종용하였다. 이처럼 1890년대 초를 전후하여 전라도의 교세가 크게 늘어나자, 동학 교단의 지도부는 74) 오지영, 『동학사』, 459쪽. 75)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237쪽. 76) 「진도종리원연혁」, 『천도교회월보』 261(1932년 11월호), 36쪽. 77) 이돈화, 『천도교창건록』, 599 601쪽. 78)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386-3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