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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39 어져 무릉도원에 있는 것 같다. 속오군을 모집함. 우리읍의 속오군을 모아 강진 병영에 도착하였으나 온 고을이 소란스러워 농부는 쟁기를 버리고 나무꾼은 도끼를 던져버려 농사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때를 맞아 동학도는 스스로 ‘도인’이라 부르면서(이는 장각의 태평도인과 같은 부류임) 고 부 금구를 함락하고 전주까지 함락하니 감사, 판관 이하는 모두 도망쳤다. 이에 東賊이 크게 일어나 사방이 바람에 휩쓸리듯 여러 성을 함락시키니 오늘은 수천명, 내일은 수만명으로 불어나는 추세이 다. 그들은 부적을 차고 주문을 외우며(장각의 행적을 본뜸) 강도질도 일삼은 포악한 행동을 하여 父, 君, 貴, 賤이 없었다(『구례 유씨가의 생활일기』 상, 23쪽). 현재의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에서 살았던 유제양은 서울에 과거를 보러 다녀오다가 전봉준의 농민군이 백산에 집결한 상황을 목격하였다. 69) 그는 백산봉기후 닷새만에 남원을 지나던 중이었는데, 이미 그곳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있었으나, 구례는 아직까지 평온한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례에서도 束伍軍을 편성하여 강진 병영으로 파견하는 등 위기감이 고조됨으로써 구례의 농민들도 생업에 전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동학교인들은 부적을 차고 주문을 외웠으며,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교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구례 동학농민군이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는 과정을 통해서 전남 북부 지역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4. 전남 남부-연해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 나주의 남쪽, 무안의 남동쪽에 있는 영암도 1890년대 전반 동학을 수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1893년 음력 3월 보은취회에 영암의 동학교인들이 참여 70) 한 사실에서 그러하다. 당시 영암접 40여 명의 동학교인이 보은취회에 참가했다가 음력 4월 2일 귀가한 점으로 보아 이미 영암의 동학 교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영암출신 金義泰(1867-1928)는 1893년 음력 1월에 동학에 입교하여 보은취회에 참여하여 최시형을 만났다고 한다. 71) 요컨대, 영암의 동학교인들은 1890년대 전반 동학을 받아들였으며, 그중 김의태 등 40여 명의 동학교인들이 보은취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영암의 교세가 확대일로에 있었다. 무장기포 이후 申성(木+聖) 申欄 崔永基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대회에 합류하였다. 72) 다만, 이들이 전라우도의 유인전술과 전주성 점령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영암의 남쪽에 위치한 해남은 어떠했을까. 해남의 경우에도 동학 수용 시기는 영암과 비슷한 편이다. 즉, 1893년에 崔邰一이 입교한 사실 73) 에서 그러하다. 그 이후 교세가 얼마나 증가했는지는 69) 『구례 유씨가의 생활일기』 상(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1), 22∼23쪽. 70) 『취어』,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2, 74쪽. 71) 『천도교회월보』 205, 1928년 1월호, 62쪽. 72) 오지영, 『동학사』, 458-459쪽. 73) 이돈화 편, 『天道敎創建錄』(천도교중앙종리원, 1934), 5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