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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공창윤을 비롯한 梁亨淑 梁局三 徐公瑞 李敬九 梁得三 등에게 동학을 포교하였다. 그해 가을 최제우는 남원읍에서 서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은적암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저술하며, 수행하다가 1862년에 경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남원의 동학교인들은 경주를 내왕하며 동학교단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중 최제우가 ‘平世思亂 暗地聚黨’의 죄로 처형되자 다소 위축되었다. 1889년에 이르러 남원의 金洪基가 다시 동학교단과 접촉하여 남원 지역 포교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원의 金榮基 金鍾友 李起冕 李起東 金鍾黃 柳泰洪 등이 수천 명의 교인을 확보함으로써 교세가 급신장하였다. 이들의 영향으로 인근에 위치한 곡성과 구례에 동학이 전해진 것이다. 구례는 다소 늦게 동학이 수용되었지만, 교인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 결과로 1893년 음력 정월에는 전봉준이 작성한 창의문을 각 군의 아문에 게시하는 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즉, 구례에서는 남원출신의 유태홍이 곡성의 김재홍 등과 함께 각 군의 아문에 창의문을 붙였던 것이다. 66) 그후 구례 동학교인의 활동은 백산대회에서 확인된다. 구례의 林春奉이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집회에 참여하였다. 67) 그가 언제 동학에 가담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1892년에 동학을 받아들인 임양순, 임태순 등과 같은 집안이거나, 아니면 두 인물중 한명과 동일인일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또는 집강소 시기이후 구례의 접주 林定然과도 무관할 것 같지는 않으나, 현재로서는 그것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그 이후의 활동 내용을 찾을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한편, 당시 농민군들의 기율은 이른바 「12개조 군율」에 제시된 바와 같이 상당히 엄격하였다. 나아가 전봉준은 농민군 지도자들에게 “언제나 적을 대할 때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장 큰 功으로 삼겠다. 비록 부득이 싸우더라도 절대 人命을 상하지 않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行軍할 때는 절대 사람을 해쳐서는 안된다. 그리고 孝悌忠信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으면, 그 주위 10里 안에는 주둔하지 말기를 바란다” 68) 고 명령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전봉준 스스로 효자 전일귀의 효성을 강조하고 제사를 지낸 점에서 이들의 지향성이 드러난다. 즉, 이들은 유교적 윤리에 기초한 무혈혁명을 지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농민군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자, 가장 두려워하는 세력은 수령과 향리뿐만 아니라 토착양반들이었다. 그 가운데 당시 구례 雲鳥樓의 주인 柳濟陽(1846∼1922)은 동학이나 농민군과 관련하여 목격하거나 들리는 소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894년 음력) 4월 1일(양 5. 5) 저녁에 남원읍에 머물렀는데 한밤중에 시끌벅적한 소리에다 울음소 리가 섞여 들렸다. 모집된 砲手軍들이 고부에 다다랐는데 동학배들이 백산에 모여 관군과 대치하여 군사를 모아 토벌하는 중이라 한다. 아침에 栗嶺을 넘어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오니 소요가 아득히 멀 66) 남원종리원 편, 「종리원사부동학사」. 67) 오지영, 『동학사』, 459쪽. 68)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