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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견주어 보건대 담양의 경우에도 1890년을 전후하여 동학이 들어왔으리라 추정되는데, 담양의 동하교인들이 보은취회 등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무장기포이후 백산대회에 담양 지역의 농민들도 적극 가담했음이 확인된다. 즉, 담양도호부에서 南周松 金重華 李璟燮 黃正郁 尹龍洙 金羲安 등, 창평현에서는 白鶴 柳亨魯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백산으로 달려갔다. 53) 하지만 집강소 설치 이전까지의 이들의 동향은 파악되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한편, 일본은 담양의 이 아무개를 장성에서 싸울 때 닭장태(鷄 塒 )로 탄환을 막은 것에 연유하여 호를 日 塒 라고 했으며, 그가 담양과 태인에서 활발히 활동한 것으로 파악했음 54) 이 주목된다. 이 아무개는 훗날 체포된 李長泰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이름이 닭장을 의미하는 장태라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동학접주로서 ‘호남의 巨魁’였다는 사실 55) 로 미루어 보아 그러하다. 또한 그는 전라북도 태인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볼 때 당시 태인을 관할했던 대접주 孫和中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장성 황룡싸움에 참가하여 장태전술을 고안하여 승리의 주역이 되지 않았나 한다. 대나무 산지로 유명한 담양 출신인 그가 변변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대나무 匠人으로 보이며, 그래서 일본측은 그의 이름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장태전술을 고안한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日塒 혹은 장태로 불렀을 것이다. 요컨대, 동학접주 이장태를 비롯한 담양의 동학농민군들은 손화중포와 밀접한 연계아래 장성 황룡싸움의 승리의 원동력을 제공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전주 공격에도 적극 가담하였으리라 믿어진다. 한편, 이들이 농민군으로 활동하고 있던 음력 5월 2일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담양부에 농민군 진압에 투입할 砲軍 300명을 지시하였다. 56) 이미 창평에서는 음력 4월 초순에 군대와 포군을 징발하여 태인과 부안으로 보낸 바 있었다. 57) 담양의 동쪽에 자리한 현재의 곡성은 1894년에 곡성현과 옥과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기서는 현재의 행정구역상 곡성군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런데 곡성군에 언제부터 동학이 수용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남원과 인접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최소한 1890년을 전후하여 동학이 들어왔을 것이다. 1861년 전후에 최제우가 머물렀던 남원은 1889년에 이르러 교인이 수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58)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곡성의 경우에 1890년을 전후하여 남원으로부터 동학을 수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곡성의 동학교인들은 동학을 구례에 전파하였다. 1892년 곡성의 동학교인 奇鳳鎭의 전도로 구례에서는 許鐸 등이 동학을 받아들여 수백 호의 敎勢로 성장했다고 한다. 59) 요컨대, 곡성에는 늦어도 1890년을 전후하여 동학이 수용되었고, 1892년에는 구례로 동학을 전해주는 역할을 53) 위와 같음. 54)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63쪽. 55) 「巡撫先鋒陣謄錄」, 『동학란기록』 상, 606쪽. 56) 「兩湖招討謄錄」, 『동학란기록』 하(국사편찬위원회, 1971), 205쪽. 57) 황현, 『번역 오하기문』, 79쪽. 58) 남원군종리원 편, 「宗理院史附東學史」, 1924. 59)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