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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33 나주를 공격하겠노라고 엄포하는 한편, 실제로는 장성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7일 동안 함평에 주둔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한편,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4월 22일 전봉준은 나주를 공격하는 양 하면서 주력 농민군을 이끌고 장성으로 나아갔다.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의 추격을 분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홍계훈은 농민군의 주력이 장성으로 진격하자 대관 李學承 등에게 군사 300명과 대포 등 신무기로 무장하여 출동시켰다. 마침 농민군의 주력은 장성 월평의 황룡장터에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이들은 경군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사방에 경계를 세웠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이학승의 선봉대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대포를 발사하였다.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농민군은 숫자가 적은 경군을 협공하여 선봉장 이학승 이하 6명을 죽이고 쿠르프포 1좌 등 신무기를 노획하였다. 40) 당시의 상황에 대해 황현은 다소 이색적인 내용을 남겼다.· 적(농민군-저자주)은 병기를 거두고 조금 물러났다가 곧바로 삼봉위로 올라가 진을 배치하였는데, 마치 학(鶴)의 모양과 같았다. 적은 위에서 아래로 관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홀연히 커다란 대나무로 만든 통을 밀고 나왔는데, 둥그스럼한 닭의 집과 비슷한 것이 수십개였다. (중략) 적은 대나 무 통 뒤에서 총을 쏘며 따라오다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초토군의 진영은 멀리서 빤히 바라보 면서 도와주지 못한 채 그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도록 방임하였다. 적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병력을 수습하여 돌아갔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90쪽). 농민군의 진법과 전술, 즉 학익진과 장태전술에 관한 내용이다. 농민군은 신무기를 소지한 경군을 상대로 전혀 새로운 전술인 지형지물을 이용한 ‘장태전술’로 크게 이겼다. 장태는 닭장을 의미하는데, 전라도에서는 가볍고 단단한 대나무로 둥우리처럼 둥글게 만들었다. 전라도에서는 이것을 흔히 ‘닭장태’ 혹은 ‘대장태’라고 불렀다. 따라서 장태전술은 대나무로 장태를 둥글게 만들어 그 안에 짚을 가득 채운 후 엄폐물과 공격도구로 활용한 것을 말한다. 즉, 장태전술은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농촌생활의 지혜를 활용하여 강력한 서양무기로 무장한 경군을 혼비백산케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특히, 오합지졸이라 생각한 농민군이 경군과 접전한 최초의 전투에서 대포를 비롯한 신무기를 노획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위정자들은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른바 장태전술은 장태의 형태와 그러한 전술을 고안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41) 황현과 오지영은 장태에 바퀴가 부착된 것으로 서술하였으나, 이병수와 이춘영은 장태의 바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供招」에서 황룡싸움을 언급하였지만 장태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40) 『양호초토등록』, 『동학란기록』 상, 172쪽. 41)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195-20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