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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으며, 총을 가진 사람들 뒤에는 죽창을 든 자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걸으면서 휘어지고 꺾 이면서 혹 ‘지(之)’자를 또는 ‘구(口)’자를 만들기도 하면서 진세를 배열하였는데, 모두들 어린아이가 잡고 있는 푸른색 기가 지시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대개 적들은 어린아이 중에 서 키가 작고 교활한 아이를 뽑아서 진중에 두고 며칠 동안 미리 어떤 진을 펼칠 것인가를 가르치고는 그럴싸하게 신동이라고 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이는 戰國時代 제나라 장수 田單이 신령스러운 장수를 받들었던 지모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것도 모르 고 참으로 신인(神人)인줄 여겼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86-87쪽) 다소 장황하게 인용했는데, 농민군의 행진하는 광경을 이처럼 상세하게 서술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들의 진법과 무기를 과시하였다. 아마도 지금까지 준비한 진법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또한 이들은 인의예지와 같은 유교적 이념과 민중을 두루 구제하겠노라는 거의 목표를 깃발에 써놓았다. 관아에서 징발한 갑옷과 투구, 관복과 마필, 총과 죽창 등으로 무장한 농민군들이 각자 5색 수건을 두르고 일사분란하게 진법훈련을 펼치는 모습은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어린아이를 이용하여 주민들을 선동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처럼 행동하였다. 이처럼 농민군이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 모습은 인근 지역으로 삽시간에 펴졌을 것이다. 산간벽지인 구례에 은거 중이던 황현이 듣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함평에 머물던 전봉준은 음력 4월 19일 양호초토사인 홍계훈에게 글을 보냈다. 호남의 유생들은 피맺힌 원한을 가슴에 품고 엄숙한 위엄과 백성들의 하소연을 잘 들어 주시는 귀하 에게 삼가 글을 올립니다. (중략) 오늘날의 지방관들은 나라의 법을 도외시할 뿐만 아니라, 백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아 탐욕과 포악함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더구나 각 관청의 구실아치들은 백 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굴어, 그것들을 참고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 가운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가 열에 여덟아홉으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여기저기 길바닥에 흩어져서는 노인을 부축하고 아이들을 이끌고 도랑이나 구덩이에 뒹굴고 있습니다. 살아 갈 길은 만 에 하나도 없으니, 이 불쌍한 백성들은 죽기도 쉽지 않아, 서로 모인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중략) 오늘 저희들의 행동은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손에 병기를 거머쥐고 오직 살아 날 방법을 강구하자는 것입니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88-89쪽). 거듭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전봉준은 수령과 이서배들의 불법적 수탈 행위를 거론하며 자신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을 누누이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나주목의 공형들에게도 글을 보내어 체포된 동학교인을 석방해주면 나주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나주목사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