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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37 둘째, 1908∼9년 사이에 전개된 광주-전남 의병의 강력한 반일투쟁은 일제의 식민화정책을 지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일제는 1909년 후반 경 조선을 강점하려 하였으나, 광주-전남 의병의 투쟁이 장기화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아가 전라도민들의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크게 고양시켰다. 214) 결국 日帝는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광주-전남 의병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이후에야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셋째, 국내에 항일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는데 공헌하였다. 광주-전남 의병은 장기항전의 기반을 지리산과 같은 산악지대와 島嶼 지역에 구축하였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민족해방투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이는 광주-전남 의병의 활동목표와 지향성이 그후의 민족해방투쟁으로 계승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다만, 국내에 기지건설을 추진한 까닭으로 이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국외의 독립운동으로의 전환이 더디고 미약한 한계가 없지 않았다. 넷째, 광주-전남 의병은 명문 유생에서 가난한 농촌지식인과 貧農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김준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의병부대가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할 것이다. 다만, 광주-전남 의병과 다른 지역 義陣간에 유기적인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점은 한계로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또한 향토수호와 안민을 목표로하는 의병항쟁에 치중함으로써 국외의 독립운동으로의 전환이 상대적으로 더디고 미약한 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광주-전남의 의병계 인사들이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인 독립의군부와 광복회, 임자밀맹당 등을 주도한 점에서도 그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1910년대 이후 民族運動上에서의 광주-전남 의병의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고 하겠다. 끝으로 광주-전남 의병의 성격을 앞서 살펴본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때 反侵略民族運動이라 할 수 있다. 민중운동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215) 중기의병 이후만 하더라도 재지 양반 유생층이 주도한 의병항쟁을 민중운동으로 보기에는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중운동이라면 마땅히 민중의 계급적 이해를 앞세워 그들의 권익을 쟁취하는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의병활동을 민중운동으로 보기에는 설득력이 다소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이를 부르조아민족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하나, 216) 의병항쟁을 주도한 계층이나 계급적 시각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에 투쟁한 反帝鬪爭을 강조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광주-전남 의병항쟁의 성격을 반침략민족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14) 李東宇, 「全北義兵의 役割과 意義」, 『史學硏究』 55·56합집(1998), 689쪽. 215) 홍순권, 앞의 책, 8-13 333-334쪽 참조. 216) 오길보, 「19세기말 -20세기초 반일의병투쟁의 성격」, 『력사과학』 1966년 제6호, 16쪽 및 강재언, 「반일의병운동 의 역사적 전개」, 『조선근대사연구』(1970) ; 『한국근대사연구』(한밭출판사, 1982), 342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