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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농민군을 학살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피해 지역이 바로 전라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말미암아 농민군은 최소한 3만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농민군 지도부를 비롯한 농민군 세력은 무엇을 얻기 위해 고귀한 생명과 소중한 재산 등 엄청한 희생을 치렀던 것일까. 폐정개혁운동을 통해 분출된 이들의 요구로써 농민군의 지향점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노쇠한 왕조의 부패한 위정자들을 구축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들은 삼정의 문란을 비롯한 가렴주구 행위의 중지와 같은 경제개혁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강제 개항에 의한 무역 피해를 최소화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요컨대 소농경제 중심의 경제개혁을 지향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들은 중세적 신분제 폐지와 농민적 자치의 실현을 요구하였으나, 213) 아직은 자신들의 역량 미숙을 확인하는 선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점은 興宣大院君의 섭정 복귀와 개혁정치에 기대를 거는 한계를 보였다. 즉 이들은 독자적 권력구상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독자적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한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비교된다. 다시 말해서 농민군 지도부의 독자적인 정권구상과 토지개혁과 같은 근원적인 정치 경제적 개혁을 지향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폐정개혁을 추구하던 집강소 시기에 경제 사회적 개혁을 추진했으나 일본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미완의 혁명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볼 때 동학농민혁명은 처음에는 반봉건투쟁으로 시작된 농민항쟁이었으나, 2차 봉기 이후 반외세 반침략투쟁으로 전환되었다고 하겠다. 비록 일본의 무력개입으로 인해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에 그쳤으나, 농민군의 요구가 갑오개혁에 일부 반영됨으로써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더욱이 불굴의 의지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학을 재편한 천도교를 기반삼아 민족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은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은 3 1운동의 중심축으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후 민족해방운동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한편, 한말 광주-전남 의병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에 대하여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광주-전남 의병의 정신적 근원은 멀리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라도 의병의 역할에 대한 자긍심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광주-전남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의 대부분이 왜란에 참여한 의병의 후손이란 점에서 입증된다. 물론 이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병인양요시 의병을 일으켜 상경한 사실에서도 사상적 영향이 상당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勤王的인 성격과 연고지역을 스스로 지키려는 향토 수호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차원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다만, 전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농민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反東學的 성향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후기의병에 이르러 그러한 갈등이 해소됨으로써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장기항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213) 박찬승, 『근대이행기 민중운동의 사회사』, 3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