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page

한말의병 335 결 론 광주-전남의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5개 권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알아보았다. 동학농민혁명이 군현단위의 우발적 일회적 농민항쟁을 극복하고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는 동학의 수용에서 찾아진다. 동학의 抱接制가 小農 중심의 마을공동체 조직인 두레와 결합함으로써 투쟁역량이 크게 강화되었다. 212) 그런데 광주-전남의 경우 동학의 수용과 제1차 동학농민혁명은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거쳤다. 특히 영광 함평 장성 등 전남 서부지역의 농민군은 전봉준의 우회전술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전남 서부 지역은 그 이후까지 전봉준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활동하였다. 반면에 전남 동부 지역의 농민군은 전라좌도를 관할하던 김개남의 직접적인 영향아래에서 일본군의 서진을 막고 경남 서부지역의 세력 확산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전남 남부-연해 지역은 농민군의 마지막 보루로서 최후항쟁지라는 특징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군의 희생이 엄청났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처럼 농민군의 희생이 컸던 까닭은 농민군의 화력의 열세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수성군과 관군 그리고 일본군의 잔혹한 탄압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본은 농민군의 섬멸을 목표로 반인권적 방법으로 농민군 세력의 제거의 혈안이 되었다. 당시 농민군이 얼마나 참담하게 희생되었는가. 아래와 같이 기록한 오지영의 글을 다시 한 번 제시하고자 한다. 東學軍으로서 官兵 日兵 守城軍 民包軍에게 當한 慘殺 光景은 이러하였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일, 칼로 찔러 죽이는 일, 몽동이로 때려 죽이는 일, 불에 태워 죽이는 일, 목을 옭아 죽이는 일, 땅에 파묻어 죽이는 일,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일, 물에 집어 넣어 죽이는 일 等 가지 各色으로 죽 이는 慘景은 日月도 빛이 없고 草木도 실품을 머금었다. 千里江山이 다 같이 당한 일이지만 그 중 에도 가장 慘酷한 곳이 全羅道가 第一(『동학사』, 505-506쪽) 그들은 이른바 ‘銃殺 突殺 打殺 燒殺 絞殺 埋殺 水殺’ 등 참혹하기 그지없는 갖가지 방법으로 212) 백승종,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에 소농을 생각한다」, 『녹색평론』 2014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