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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33 남으로는 목포에 이르기까지 사방을 그물을 펼치듯이 포위하였다. (그들은) 촌락마다 샅샅이 수색 하기를 마치 참빗으로 빗질을 하듯 집집마다 뒤지다가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죽였다. 그 리하여 도로마다 인적이 끊겨 이웃마을조차 연락이 두절되었다. 의병들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삼 삼오오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수 없었다. 강한 자들은 돌진하여 싸우다가 죽었고, 약한 자들은 기어 도망하다가 칼을 맞았다. 점차 쫓기어 강진, 해남 땅에 이르렀으나 더 이상 달아날 곳 이 없이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황현, 『梅泉野錄』, 504쪽). 앞의 <표> 의병의 피해에서 확인되듯이 전라도 의병은 ‘작전’중에 의병장을 비롯한 420명이 전사하였고, 약 1,700명이 체포 또는 투항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유례없는 ‘작전’으로 말미암아 산간내륙과 연안 도서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의 피해는 <표>에서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작전’종료 후 최종 집계된 체포 또는 자수한 의병만 약 3,100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206) 또한 일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지만, 주민들의 경우에도 적지 않은 인명피해와 가옥 소실, 강제동원 등으로 인하여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이는 의병항쟁 기간 동안 단 한차례의 진압작전에 의해 입은 피해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그들 스스로도 “대토벌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쾌거로서 그 규모가 엄청나서 마치 대전쟁” 207) 이라고 평할 정도로 가장 방대하고 무자비한 군사작전이었다. 한편, 일제는‘작전’중 전라도에 신화폐를 대량 유통시킴으로써 구화폐인 엽전의 정리사업을 촉진시켰다. 또한 도로와 교량을 수축하거나 가설함으로써 교통로를 크게 개선하였다. 도로나 교량 개수공사는 일제가 종종 사용해왔던 방법으로,‘작전’기간 중에도 활용하였던 것이다. 교통로의 확보는 주민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병의 진압 및 경제적 침투에 크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208) 그리고 전라도에서 생산한 곡류와 면화의 대일수출이 크게 증가하였는데, 면화의 경우에 그 이전에 비해 최소한 4배나 급증하였다. 209) 이와 동시에 전라도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본인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일찍부터 이 지역을 유수의 산업지로 주목했던 일본인들이 농업과 목축, 상공업 등의 분야에서 이른바 ‘對韓事業의 발흥’을 도모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요컨대 그들이 목표로 했던 호남지역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본격화한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광주-전남 의병의 완전 진압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위한 토대가 구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작전’을 종료한 직후 일제는 체포 또는 자수한 의병과 전라도 지역에 대한 후속조치를 단행하였다. 해남-강진-장흥-보성-벌교-순천-광양-하동을 잇는 총 연장 350리의 도로개수공사의 착수가 그것이다. 이 공사는 1909년 11월에 시작하여 1910년에 완료할 예정으로 21만원의 건설비를 206) 『편책』, 『독운사』 1, 873쪽. 207) 『편책』, 『독운사』 15, 514쪽. 208) 『토벌지』, 『자료집』 3, 672쪽. 209) 『편책』, 『독운사』 1, 8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