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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투입시켰다. 197) 도서지역에 군함을 배치하는 것은 당시‘작전’과 짝하여 추진된 이른바‘경비선 배치계획’에 의거한 것이었다. 198) 일제는 대포를 탑재한 중무장 경비선 16척을 건조하여 그 중 10척은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전라남도에 집중 배치하고, 나머지 6척은 密漁取締를 위해 황해도와 평북 연안에 배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라남도에 石油貯置場 두 곳과 경비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9) 이로 인해 도서지역 의병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200) ‘작전’과 동시에 진행된 경비선 배치 소식에 도서지역 의병들을 크게 동요하였다. 당시 완도를 배경으로 투쟁하던 유배수 출신의 의병장 黃俊聖은 ‘작전’을 피해 해남 등지로 이동하였다. 201) 그후 황준성 등은 ‘작전’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중 결국 완도에 다시 들어와 잠복했다가 1909년 10월말에 자수하였다. 202) 해남출신이었던 黃斗一은 ‘작전’실시 직전에 일부의 부하와 같이 자수하였고, 뒤를 이어 그의 부하들도 대거 투항하였다. 203) 육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들도 일제의‘작전’에 대비하여 자신들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이들은 1909년 7월경 강진 등지에 모여서 일제의 대규모 군사작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잠복하기로 의견을 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은 부대를 해산한 후 싸우다 죽거나, 체포 또는 자수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광주-전남 의병은 일제가 스스로 “대전쟁”이라 불렀던 대규모의 초토화전술에 의해 두 달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작전’이 종료된 직후 일제는 “전라남도의 천지는 가장 청정하게 소제” 204) 되었다고 평가함으로써 결과에 크게 만족하였다. 그들은 ‘작전’중에 ‘가장 현저한 공로’를 세운 3개 중대, 즉 심남일과 강무경 등을 체포한 제2연대 3중대, 황준성 의병부대를 大芚寺에서 격파하고 황두일 등 백수십 명을 자수시킨 60중대, 안규홍을 체포하고 그 부하 다수를 자수시킨 8중대를 포상하였다. 205) 이와 같이 일제의 ‘작전’에 의해 광주-전남 의병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는데, 이는 곧 대한제국기 의병항쟁의 급격한 쇠퇴로 직결되었다. 당시 의병투쟁을 주도했던 지역이 바로 전라도였기 때문이다. 일제의 ‘작전’을 직접 목격한 黃玹은 당시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왜인들은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하였다. 위로는 진산 금산 김제 만경, 동으로는 진주 하동, 197) 위와 같음. 198) 皇城新聞 1909년 8월 7일자 「水上警備船」과 8월 26일자 「警備船配置豫料」 및 「제4. 警備船 成績의 大要」, 『독운 사』 1, 870-873쪽 참조. 199) 皇城新聞 1909년 8월 7일자 「警備船事務所」. 200) 위의 신문 1909년 9월 12일자 「海賊逃避」. 201) 『편책』, 『독운사』 15, 545쪽. 202) 『편책』, 『독운사』 16, 358-360쪽과 『자료집』 별집 1, 920-922쪽. 203) 『편책』, 『독운사』 15, 334-335 493-494쪽 및 「의병장 강사문 안계홍 황두일 권영회 심남일 강무경 취조서」, 『독운사』 1, 788-789쪽 그리고 김의환, 앞의 논문(1987), 238쪽. 204) 『편책』, 『독운사』 1, 818쪽. 205) 『편책』, 『독운사』 1, 8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