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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31 먼저 ‘작전’의 기간과 시기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약 40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1∼2기의 성과가 미진하여 10월말까지 약 15일 정도 더 연장되었다. 191) 일제는 제3기를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하되, 제1∼2기에 해당하는 지역에 병력을 재차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9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 체포되거나 전사한 전라도 의병의 약 절반 정도는 9월 하순에 발생하였다. 192) 일제의 작전구역은 전라남도 전체와 전북의 남부 및 경남 하동 일부가 포함된 섬진강 이서 지역으로, ‘작전’에서 ‘남한’은 주로 전라남도를 지칭한다. 따라서 ‘작전’대신에 ‘1909년 전남 의병대학살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작전’에 참여한 주력부대는 임시한국파견대 2개 연대로서 약 2,260명의 규모였다. 대규모 병력을 일시에 투입했기 때문에 소요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193) 예컨대 임시파견대에 책정된 예산이 61만원 이상이었지만 그도 모자라 예하부대에서는 경비의 부족을 호소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인 시설 소유자와 인부들은 사용료와 노임을 일본인에 비해 1/3 수준밖에 지급받지 못하였다. 194) 그마저 예산이 없을 때에는 지방 관청에 지시하여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에 종사시킨 경우도 많았다. 임시한국파견대 외에도 현지의 헌병대와 경찰서, 그리고 해군 11정대 등이 공동전선을 펼쳤음은 물론이다. 또한 전라남북도 관찰부를 위시한 부 군 면 등 지방행정기관이 총동원되어 일제의 진압작전에 적극 협조하였다. 임시한국파견대의 제1연대는 순창-담양-나주-목포를 연결하는 전라남도의 서북지역, 제2연대는 그 연결선상의 동남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다시 경비부대와 행동부대로 나누어 전자는 포위선을 형성하여 수비에 치중시키고, 후자는 포위선 내의 의병을 진압하는데 중점을 두게 하였다. 당시 행동부대는 1일 전진 속도를 4킬로미터로 제한하면서 목포-해남방향으로 포위망을 압축해갔다. 행동부대는 촌락마다 최소 2회 이상 십수 차례에 걸쳐 수색하였다. 그들은 20∼60세에 해당하는 촌락의 모든 남자들을 면장이나 동장의 입회하에 民籍이나 男子名簿와 철저히 대조하였다. 195) 더욱이 이들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교반적 방법이라는 초토화방법으로 수색하였기 때문에 포위망을 벗어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특히 군경으로 편성된 변장대를 투입한데다 체포된 의병을 밀정으로 이용하여 곤경에 처한 의병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였다. 일제는 임시한국파견대의 사령부를 작전지역 안에 설치하고 사령관이 직접 의병 진압을 독려하였다. 한편, 연안과 도서지역의 경비와 수색은 11정대를 비롯한 해군의 주된 임무였다. 이들은 전라남도 서남해안과 도서지역의 의병을 진압함과 동시에 내륙에서 활동하는 의병의 도서진출을 막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군함을 동원하였다. 196) 아울러 육군에서는 이 지역에 제1연대 제 3 4중대를 191) 『편책』, 『독운사』 1, 804쪽·같은 책 15, 890쪽. 192) 『편책』, 『독운사』 15, 819-821쪽. 193) 『편책』, 『독운사』 1, 802-803 820-824쪽 참조. 194) 위의 책, 802-803쪽. 195) 위의 책, 811쪽. 196) 『토벌지』, 『자료집』 3, 8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