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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31 영광으로부터 함평으로 농민군이 몰려오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에 앞서 각 면의 士林 100여 명이 이들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미리 모여서 날마다 東軒에 들어 와 지키고 있었다. 그들 수천명이 사방을 포위하고 총을 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수십명이 堂에 올 라 말하기를, “우리는 탐관오리를 징벌하여 다스리고, 邑幣民 瘼 을 바로잡아 輔國安民하기 위해 각 고 을을 두루 돌아 本縣에 왔다. 지금 士民들이 동헌에 들어와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니, 이 고을 현감의 치적을 가히 알 만하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바로 동헌 밖으로 물러 나갔다. 이들이 각 관청을 점령 한 후 나누어 머물면서 읍내의 饒民들로부터 양곡을 징발하여 민가에서 취식하였고, 公兄들을 잡아 들여 자신들을 환영하여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다하여 큰 곤장 5도씩 때렸다(『兩湖招討謄錄』, 『東學 亂記錄』 상, 170쪽). 농민군의 공격 소식에 함평의 사림 100여 명이 동헌을 호위하며 수령을 보호하려 했으나, 농민군들이 읍폐민막을 바로잡아 보국안민하기 위함이라는 외침을 듣고 일제히 물러났다는 것이다. 결국 함평의 사민들도 수령의 탐학과 민폐의 시정을 간절히 원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신에 이들은 농민군에 비협조적이었던 이속들을 징벌하고, 부호로부터 곡식을 징발하여 농민군의 군량을 조달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들은 함평에서도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함평을 장악한 이들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세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승리를 자축함과 동시에 함평읍민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적(농민군-저자주)들은 함평에 있으면서 진세를 펼치고 기예를 과시하여 눈을 어지럽게 하 였다. 평민이 선두에서 나이 십사오 세쯤 된 아이 한 명을 업고 진 앞에 나섰는데, 아이는 푸른 색 홀기(笏旗)를 쥐고서 마치 지휘하는 것과 같았고 그 뒤를 뭇 적들이 뒤따라왔다. 앞 에서는 날라리를 불고 그 다음에 ‘인(仁)’자·‘의(義)’자를 새긴 깃발 한 쌍이, 다음에는 ‘예 (禮)’자·‘지(智)’자를 새긴 한 쌍이, 또 다음에는 흰색 깃발 두 개가 뒤따랐는데, 그 중 하 나는 ‘보제(普濟)’라 썼고, 다른 하나에는 ‘안민창덕(安民昌德)’이라 썼는데 모두 전서체로 씌어졌다. 다음의 황색기 하나에는 해서로 ‘보제중생(普濟衆生)’이라 씌어 있었고, 나머지 깃발에는 각 고을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다음은 갑옷에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검무를 추 는 자가 한 명, 그 다음에는 칼을 가지고 걷는 자 네다섯 쌍, 다음에는 피리를 불고, 다음의 한 명은 벼슬아치들의 관모를 쓰고 우산을 가지고 도인의 복장을 하고 나귀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소매가 좁은 옷을 입고 관모를 쓰고 우산을 가진 대여섯 명이 나귀를 타고 있는 사 람의 주위를 에워싸고 따랐으며, 그 다음에는 두 줄로 만여 명의 총수(銃手)가 뒤따르는데, 모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머리에 두른 수건은 다섯 가지 색깔로 색이 각기 달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