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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23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인 의병의 진압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군사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1904년 8월에 조선주차군을 2개 사단으로 증강 배치하였으며, 이어 9월에는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조선주차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143) 일제는 의병을 진압해야만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다는 판단아래 대규모의 병력을 대한제국에 배치한 것이다. 그리하여 통감부를 설치한 1906년 초부터 일제는 본격적으로 의병진압에 나선 것이다. 144) 당시 일제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의 부대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비하여 의병들은 열악한 무기와 훈련이 전혀 안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병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현지 지형에 익숙하였으므로 일제의 진압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는 먼저 한국의 군사적 기반을 무력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예컨대, 1907년 8월의 군대해산, 9월의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11월의 砲軍 혁파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의병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더욱 증가하였다. 군대해산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의 전투역량이 크게 높아졌다. 또한 수렵을 업으로 삼았던 함경도의 산포수들이 일제의 강제적인 총기회수에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145) 이는, 그들이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한 자위적 차원에서 의병에 투신한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일제는 도로건설과 통신시설의 확대에 주목하였다. 146) 가난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도로의 건설과 통신시설을 더욱 周密하게 함으로써 의병의 진압을 보다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울러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대책을 마련해줌으로써 그들이 의병에 투신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귀순정책의 실시와 같은 懷柔策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일제는 의병진압에 관하여 한국정부 및 일제 침략기구와 긴밀히 협의하였다. 특히, 1907년 8월을 전후한 시기와 1908년 2∼5월경, 그리고 1909년 4월 무렵에는 빈번하게 의견을 교환했음을 알 수 있다. 147) 이 시기에 의병활동이 크게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08년 초의 경우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强穩 탄압책을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148) 이와 같은 일제의 의병대책의 기조는 1907년 겨울 이래로 의병의 회유책에 중점을 두었으나, 1908년 5월경에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149) 이와 관련하여 일제는 軍務局長을 한국에 파견시켜 143) 위의 논문, 212쪽. 144) 홍순권, 「의병학살의 참상과 ‘남한대토벌’」, 『역사비평』 45, 1998년 겨울호, 31쪽. 한편, 일제의 의병탄압에 대 한 헌병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승희의 「한말 의병탄압과 주한일본군 헌병대의 역살」(『한국독립운동사연구』 30, 2008)을 참고할 것. 145) 『편집자료』, 『자료집』 3, 640쪽. 146) 『편책』, 『독운사』 13, 140-143쪽. 147) 당시의 신문을 통하여 세 시기에 걸쳐 의병진압책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대한매일신 보 1907년 8월 27일자, 9월 18일자, 10월 4 10 12 13일자, 1908년 2월 8 15 19 22일자, 3월 4 15일자. 4월 2일자, 5월 6 10 13일자, 그리고 1909년 4월 3 9 21 22 30일자, 5월 5일자 등에 실린 관련기사가 그것이다. 148) 『편책』(국가기록원, 경무 88-22, 1908), 673-674쪽과 大韓每日申報 1908년 2월25일자 「鎭義方策」 참조. 149) 大韓每日申報 1908년 5월 6일자 「진압책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