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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주장하였다. 102) 이처럼 고광순은 지리산을 활용하려는 여러 의진의 시도를 보거나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고광순 의진은 1907년 음력 5월에는 능주분파소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음력 8월 초순에는 동복에 들어가려다 일본군에게 차단을 당해 퇴각하였다. 103) 그리하여 그는 燕谷根據之計를 수립하였다. 연곡근거지계는 지리산 피아골에 있는 연곡사를 근거지로 삼아 의병의 장기항전 체제를 갖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그가 10년 동안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로써 거칠게나마 전략적인 두서를 갖추게 되었음 104) 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고광순 의진은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였다. 즉, 화력과 훈련 면에서 압도적인 일제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하고서 ‘根據之計’, 다시 말해 장기항전에 대비하여 일정기간 銳氣를 기른 후에 항일투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고광순은 지리산을 의병을 위한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은 것이다. 고광순의 이러한 전략을 지리산근거지론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그의 지리산근거지론은, 柳麟錫을 비롯한 중부 이북의 의병들이 이른바 北計策을 추진한 것과 비교된다고 하겠다. 유인석은 1908년 초반 萬全之策으로서의 이른바 北計策을 구상하였다. 105) 그의 국권회복 전략으로서의 북계책은 국외의 일정 지역에 根據地를 마련하여 장기항전을 모색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장기적인 항일투쟁의 근거지로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험한 산중을 최적지로 꼽았다. 다시 말해 유인석의 북계책은 백두산근거지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義兵規則」 제32항에 그러한 내용이 들어 있다. 무릇 우리나라의 지세는 백두산 부근의 북도 여러 고을이 뿌리가 되어 가장 높고 험하니 이곳에 근거 지를 세울 수 있다. 또한 청 및 러시아와 접해 있어 양식을 비축하고 무기를 구비할 길이 있으니 이 곳에 근거지를 세워 족히 단단하게 하고 점차 세력을 뻗어 먼저 全道에 미치고 다음에 서, 동, 남쪽 으로 확대하여 여러 도에 미치게 되면 세력이 왕성해지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이 되면 기세가 크고도 치밀해져 賊은 우리의 약속을 두려워하고 사기를 잃게 될 것이다(柳麟錫, 『毅菴集』 하, 경인문화사, 1973, 140쪽). 그는 험준한 산지인 백두산이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광순의 지리산근거지론은 유인석의 백두산근거지론과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과 항일투쟁을 위한 산포수의 확보를 고려한 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동을 전개한 것으로 서술한 경우도 있으나(박민영, 앞의 책, 144~145쪽), 그러한 활동은 양회일의 쌍산의소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확실하다(박민영, 앞의 책, 139~140쪽 ; 홍영기 앞의 책(2004), 212~213쪽). 102) 梁會一, 『杏史實紀』(1950) 권 4, 9쪽 ; 홍영기, 위의 책, 211쪽. 103) 황현, 「약전」, 『녹천유고』 권 하. 104) 위와 같음. 105) 유한철, 「柳麟錫의 義兵根據地論」,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1994), 126~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