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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추진하였다. 이에 반해 후기의병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술로써 일제의 침략에 맞섰다. 이 점과 관련하여 광주-전남 의병에 대하여 일제 군경은, “我와 衝突을 거듭하는데 따라 賊은 그 行動을 實驗하여 近來에 이르러 巧妙히 地形을 利用하여 奇襲을 行하고 其集散離合의 狀이 進步한 것 같다” 91) 라고 평한 사실이 흥미롭다. 즉, 호남지방 후기의병은 이른바 “분산과 집중” 혹은 “교란과 습격”과 같은 초보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전·중기의병 시기에는 주로 거점확보후 北上하기 위한 정면공격을 위주로 하는 전술에서 후기의병에 이르러 안민지향의 유격전술로 전환되었다. 넷째, 이른바 ‘犄 角之勢’의 형성으로부터 義陣간의 聯合戰線으로 전환해갔다. 후기의병에 들어서 “무릇 일은 합치면 강해지고 분열되면 약한 것이다. 지금 의병들이 봉기하는 것을 보니 모두 병사가 천명을 넘지 않고 총은 백자루가 채 안된다. 마땅히 일제히 통고해서 일정한 장소에 會盟하여 同心合力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패한다. (중략) 이로부터 일이 있을 때는 합치고, 일이 없을 때는 나뉘었다.” 92) 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 갔다. 그 후 전라남도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던 全海山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전라남도에서 주로 활동중인 11개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湖南同義團이 결성되었다. 93) 당시 전라남도의 남부지역에서 활동중인 沈南一 의병부대는 연합전선의 형성에 적극 참여하여 호남동의단의 第一陣이 되었다. 그리하여 광주-전남 의병은 연합투쟁 내지 공동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상당한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는, 전기·중기 의병 당시 분산적으로 활동한 것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지역 주민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해갔다. 전기와 중기의병들은 주민과의 관계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기의병은 주민들의 생존권 보호에 적극적이었다. 예컨대, 미곡의 유출 금지, 가렴주구의 관리 처단, 친일세력의 제거, 납세거부투쟁의 확대 등과 같은 의병활동이 그것이다. 이로써 주민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향토를 수호하려는 광주-전남 한말의병의 戰略과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안규홍 의병은 出身地域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주민들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하였다. 당시 신문에 “「남도의병」 전라남도 통신을 거한즉 보성군에 사는 담사리라 하는 안모가 의병을 많이 모집하여 그 고을안에 두류하나 백성에게는 침범하는 일이 추호도 없다더라” 94) 라거나, “이곳은(보성 ; 필자주) 安의 출신지이기 때문에 주민들 가운데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극히 많고 도리어 안 등에게 동정을 하는 자가 있어 토벌의 효과가 적어 그들의 날뜀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95) 라는 91) 『편책』, 『독운사』 12, 345쪽. 92) 「호남의병장열전」, 『자료집』 2, 652-653쪽. 93) 『해산창의록』 권 1, 「檄諸陣海山」 및 姜吉遠, 「海山 全垂鏞의 抗日鬪爭」, 『歷史學報』 101(1984) ; 『의병전쟁연구』 상, 339-340쪽 참조. 한편, 湖南同義團에는 전해산을 비롯하여 심남일 이대극 안규홍 등 11개 義陣 약 2천명이 참 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94)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0일자. 95) 『폭도사』,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