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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11 의병부대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중기의병의 경우에는 防盜組織을 활용하거나, 노약자 및 미성년자를 귀가시키면서 청장년 중심의 의병부대로 개편하였다. 후기의병에는 상당수의 해산군인들이 합류함으로써 의병의 戰力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정책에 반발하여 의병에 스스로 투신하는 자가 증가하였으며, 의병장은 투쟁역량을 강화하고자 의병의 구성원을 ‘敢死之卒’로 개편하였다. 다음으로 활동상의 특징을 검토하겠다. 첫째, 의병들은 무기의 개조와 신무기의 확보를 통하여 투쟁역량을 강화하였다. 전기·중기 의병은 대체로 火繩銃을 주무기로 싸웠으나, 후기의병 당시인 1908년 4월에 광주-전남 의병은 뇌관식 격발장치의 개발에 성공하여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84) 이들은 무기를 직접 제작하거나 개조한 경우가 많았으며, 85) 최근에는 무기제조터가 발견된 바 있다. 86) 이 과정에서 무기의 성능이 개선되어 연발총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병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신무기를 사용하거나, 해안을 통하여 신식총을 밀수하기도 하였다. 87) 주로 서해안을 통하여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상당한 양의 총기류가 의병들에게 유입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와 관련된 일제의 情報報告가 매우 많은 편이다. 88) 특히, 의병항쟁이 활발했던 전라도와 황해도의 의병들이 신식무기를 구입하거나, 구입을 시도하는 내용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청나라 상인들이 火藥을 땅콩포대에, 총기는 毛皮에 숨겨 수입품으로 위장시켜 한국의 의병들에게 판매한다는 것이다. 89) 당시 총기 가격은 상태에 따라 1정당 50∼100원, 화약은 1斤에 5∼7원, 탄환은 1백발당 5∼10원으로 파악되었다. 이로써 볼 때 서해안을 이용한 청나라 상인들을 통하여 상당령의 신식무기가 의병들에게 유입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둘째, 지휘체계의 확립과 엄정한 軍紀를 확립하였다. 전기·중기 의병 당시에는 “無紀律”이라거나, “烏合無紀”라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즉, 당시의 의병들은 대체로 지휘체계가 확립되지 않거나 紀律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후기의병 가운데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의병부대는 엄정한 軍紀를 확립함으로써 민폐를 끼치지 않고 나아가 의병의 영속화를 기도한다고 일제가 평할 정도였다. 90) 셋째, 戰術面에서 초기에는 정면공격을 통한 邑治 점령에서 차츰 유격전술을 전환하였다. 전기·중기 의병의 경우에는 정면공격을 시도하여 거점을 확보한 후 北上하는 이른바 ‘北上之計’을 84) 『討伐誌』, 『자료집』 3, 772쪽과 『獨運史』 10, 282-283쪽 참조. 85) 예컨대, 金永伯 의병부대는 정읍의 內藏寺 부근에서, 완도의병은 片風庵에서 무기를 제조하다가 일제에 의해 발각되 었다(『편책』, 『독운사』 14, 580쪽 및 같은 책 15, 102쪽). 86) 조동걸, 「雙山義所(和順)의 義兵城과 武器製造所 遺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1990). 87) 황현, 앞의 책, 410쪽. 88) 예컨대, 국가기록원 소장의 『편책』(警務 88-5, 1907, 1210-1213 1251-1260 1268-1269쪽, 경무 88-19, 1908, 1124쪽, 경무 88-22, 1908, 0135-0137쪽, 경무 88-24, 1908, 0789-0791쪽, 경무 88-39, 1908, 0162 0173-0176 0349-0352 0661-0664쪽) 등 일제의 군경기관의 보고에는 의병의 신무기 구입에 관한 각종 정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89) 『統監府文書』 6, 441쪽. 90)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Ⅰ(原書房, 1967),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