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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07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면암 계열은 태인의병을 시작으로 호남지방의 중·후기의병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임병찬 백낙구 황준성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양대 학파는 초기에는 의병의 주도권 문제로 갈등도 없지 않았으나, 상호 연관성을 유지하며 광주-전남 의병의 장기화와 활성화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후기의병으로 갈수록 노사나 면암 계열의 활동이나 영향력이 점차 감소해갔다. 한미한 가문의 유생출신이나 평민 의병장들이 후기의병을 주도해갔기 때문이다. 한편, 광주-전남 의병항쟁의 지역적 확산과정을 보면, 처음에 장성과 나주에서 시작하여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처음에는 중서부 내륙지역에서 시작하였으나, 차츰 연해 도서지역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주도인물의 지역적 기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명문유생이나 대표적인 吏族의 지역적 배경을 기반삼아 봉기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계층이 각지에서 의병을 주도해갔던 것이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전국민들의 위기의식이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하겠다. 그리고 광주-전남 의병의 연령을 살펴보면 최연소자 14세로부터 최고령자 78세까지 약 1,500명 정도가 파악된다. 그 가운데 20대가 가장 많으며, 그 다음에는 30대, 40대 순이다. 청장년층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기·중기 의병에는 고령자가 비교적 많은 반면, 후기의병의 대부분은 청장년층으로 구성되었다. 후기의병의 경우 체력이 저하된 고령자들은 귀가를 권유받았으며,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기동성을 요하는 유격전술을 전개함으로써 장기항전이 가능했을 것이다. 직업과 신분 면에서 보면, 전기·중기 의병에는 유생층이 많은 반면, 후기의병은 농민과 상인, 수공자 등 매우 다양하다. 후기의병에는 다양한 계층이 골고루 참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지역적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雇農을 포함한 농민들이 다수를 점한 사실에서 그러하다. 또한 商人의 경우에는 주로 酒幕業과 零細商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족들도 적지 않은데, 나주의병의 사례에서 참여자를 많이 확인한데다 그 후에도 상당수의 이족들이 의병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밖에 해산군인이나 포수, 수공업자 등은 그리 많지 않다. 한편, 의병에 가담했다가 전라도에 定配된 유배수들중 상당수가 재투신하여 의병을 이끌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79) 활동시기별 인적 구성을 살펴보면, 전기의병에 비해서는 중기의병이, 중기의병보다는 후기의병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가운데 본서에서 다룬 의병부대의 경우에는 비교적 많은 구성원들이 파악되었는데, 특히 태인의병과 호남창의회맹소가 그러하였다. 아마도 유생들이 주로 참여한데다 勉菴 계열과 蘆沙 계열의 유학자들이 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79) 홍영기, 「舊韓末 全羅南道 島嶼地方 義兵에 대한 一考察」, 『東亞硏究』 21(1990), 29-3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