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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경우에는 창평 전주 임실 남원 능주 등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중기의병이후 명문가의 유생보다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유생들이 주도인물로 부상하고 있다. 고석진 고광훈 이광선 안찬재 등이 그에 해당된다. 吏族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인다. 임병찬 양한규 등은 각각 전라북도 沃溝와 南原에서 吏房과 戶長을 역임한 이족으로 전직관리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양반 유생들과도 두터운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예컨대, 옥구의 이족 임병찬은 최익현의 門人이었고, 남원의 이족 양한규는 창평 유생 고광순과 긴밀한 관계였다. 그런데 이족들이 중기의병을 주도한 또다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이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선호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즉, 1906년 후반 전라도의 이족들은 정부에서 파견한 稅務官吏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76) 또한 이족들은 새로운 제도에 의한 관제개혁에 의해 실직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77) 다시 말해 호남지방의 중기의병은 전직 관리, 그리고 세무관 파견에 불만이 많았던 이족 및 재지사족 등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후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전기·중기 의병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우선 다양한 신분들이 주도인물로 부상되었다. 양반 유생들의 경우, 명문가의 후예들은 점차 이탈되어가고 78) , 경제적으로 농민의 처지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농촌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김용구 김준 김율 전해산 심남일 등이 그들인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서당 훈장출신이었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나 중인신분도 참여하고 있는데, 김동신이 해당된다. 한편 貧農과 行商 출신들도 후기의병의 주도인물로 등장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규홍(일명 안담살이)과 강무경 등을 들 수 있다. 광주-전남 후기의병 가운데 더욱 특이한 사실은 의병출신 流配囚들이 주도인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황준성 정원집 추기엽이 그에 해당되는데, 황준성은 유생이었고, 정원집과 추기엽은 해산군인이었다. 이처럼 빈농층을 포함한 다양한 신분이 의병항쟁의 주도인물로 등장한 점은 日帝의 정치·경제적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이 사회 저변에 널리 형성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기·중기 의병과는 달리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광주-전남 의병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學統을 분류해보면 대체로 蘆沙 奇正鎭 계열과 勉菴 崔益鉉 계열로 대별된다. 노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우만 기삼연 등을 비롯한 장성의병과 호남창의회맹소 계열이 해당된다. 노사 계열은 전기의병에서 후기의병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광주-전남 의병을 주도하였다. 이들이 광주-전남 의병의 장기항전을 가능케 한 地盤을 제공했다고 76) 大韓每日申報 1906년 10월 14일자. 한편, 1905년 3월경에 전주의 이족들은 일진회와 충돌을 빚었는데, 이 사건도 이족들과 일진회 사이에 이해관계가 엇갈려 일어난 반발로 보여진다(金允植, 『續陰晴史』 下, 국사편찬위원회, 1960, 132쪽). 한편, 황해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북 영해에서도 본문에서 설명한 내용과 비슷한 갈등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大韓每日申報 1906년 11월 22일자). 77) 『폭도사』, 21-22쪽. 78) 예컨대, 기우만의 경우에는 1907년경 유인석의 이른바 「處變三事」 가운데 ’擧義‘에서 ’守義‘로 기울어갔다. 이후 그 는 의병에 나서지 않고 白笠을 쓰고 土窟에서 지내면서 의병전 편찬 등에 주력한 점에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