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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05 崔益鉉 1833-1907 양반(贊政) 華西 포천 태인 정읍 순창 1906.6 중기의병 高光洵 1848-1907 양반 창평 담양 창평 남원 지리산일대 1896 1907 · 白樂九 ? -1907 (이족) 勉菴 전주 순천 구례 광양 태인 1906-7 · 梁會一 1856-1908 양반 능주 능주 화순 1907 · 奇三衍 1851-1908 양반 노사 장성 장성 고창 영광 담양 함평 나주 광주 1896 1907-8 후기의병 金準 金聿 1870-1908 1881-1908 유생 (노사) 나주 나주 함평 영광 광주 담양 1907-8 · (兄弟) 全海山 1879-1910 유생 (노사) 임실 임실 고창 부안 영광 장성 함평 1907-9 · 沈南一 1871-1910 유생 함평 함평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장흥 1907-9 · 金東臣 1872-1933 중인 충남 회덕 지리산일대 구례 순창 거창 안의 무주 1907-8 · 安圭洪 1879-1911 평민(머슴) 보성 보성 순천 광양 고흥 장흥 1908-9 · 黃炳學 1876-1931 유생 광양 광양 순천 1908-9 · 梁鎭汝 相基 1862-1910 1883-1910 평민(주막업 진위대) 광주 광주 담양 장성 화순 1908-9 · (父子) 黃俊聖 1882-1910 유생 면암 진안 해남 완도 1909 · 전기의병의 경우에 대체로 명문 유생들이 주도했던 사실 75) 에 비추어 보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나주의병은 매우 독특한 사례에 해당된다. 한편, 나주의병과 장성의병은 신분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세하였다. 그것은 兩者 모두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반농민군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반개화적 성향에서도 서로 일치하였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장성의 양반 유생과 나주의 이족들은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反東學·反開化·勤王的 성향을 보여준다. 중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의 신분 역시 전기의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前職 官僚들이 상당수 가담했는데, 최익현·백낙구·강재천·양한규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의병봉기 지역이 좀더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전기의병의 경우 장성과 나주에 불과한 반면, 중기의병의 75) 1896년의 전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하여 鄭喬(1856-1925)는 ‘最其著名者’, ‘皆儒林之有重望者’라고 하였으 며(『大韓季年史』 上, 국사편찬위원회, 1957, 136쪽), 申箕善(1851-1909)은 ‘讀書慕義之士’로 파악하였다.(『申箕 善全集』 下, 아세아문화사, 1981, 3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