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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301 4. 武器購入: 中國과 露國에 依賴購入함. 5. 機關設置: 大韓, 滿洲, 北京, 上海 等 要處에 機關을 設置하되 大邱에 尙德泰라는 商會의 本店을 두고, 各地에 支店及旅館 又난 鑛務所를 두어서 此로써 本 光復會의 軍事行動의 集會, 往來 等 一切 聯絡機關으로 함. 6. 行刑部: 우리 光復會는 行刑部를 組織하야 日本人 高等官과 우리 韓人의 反逆分子난 隋時隨處 砲 殺을 行함. 7. 武力戰: 武力이 完備되난 대로 日本人 殲滅戰을 斷行하야 最後 目的의 完成을 期함(金喜坤 편, 『朴 尙鎭資料集』, 389쪽). 위의 인용문에 보이듯이 광복회는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비밀결사임을 알 수 있다. 실천방략에 군자금의 조달, 사관과 군인의 양성, 무기구입, 국내외 활동거점, 行刑部의 설치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준비가 완료된 후에 이들은 최종적으로 일제와 一戰을 불사해서 독립을 쟁취할 계획이었다. 다시 말해 군자금 조달 → 독립기지의 설치(사관학교, 상회 등) → 독립군 양성과 무기비축 → 독립쟁취 순으로 실천방략을 정립한 것이다. 특히, 국내외 각처에 군사활동을 위한 기관의 설치, 그리고 행형부를 통한 일본인 고관과 반역분자의 처단 등이 주목된다. 광복회는 100여 개의 잡화상 내지 곡물상을 설치하여 군사행동의 연락기관 내지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60) 또한 이들은 행형부를 통해 의연금을 납부하지 않은 악질적인 친일부호를 처단할 예정이었다. 예컨대, 경북 칠곡의 張承遠과 천안 도고의 朴容夏의 처단이 이에 해당된다. 요컨대, 이들은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국외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집, 국내의 활동거점 확보, 악질적인 일본관리 처단, 악덕부호 응징 등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이들은 혁신유림으로서 이념면에서 공화주의를 지향했으며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61) 그리하여 광복회는 1918년 조직이 노출될 당시 항일비밀결사중 가장 규모가 크고 광범하게 활동하던 단체로 성장하였다. 이제 광복회 전라도지부의 활동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광복회 전라도지부는 1916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주로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친일파의 처단, 나아가 무기의 획득 활동에 치중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부호들의 의연금에 기대를 걸었으나 그들의 비협조로 무산되자 강제적 방법을 동원하여 군자금의 조달에 나섰다. 62) 그런데 이러한 활동은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韓焄의 개별적인 활동으로 보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미 강점 이전에 의병으로 활동한 바 있는 한훈은 일찍이 풍기의 광복단에 참여한 이래 광복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그와 같이 전라도를 무대로 활동한 인물로는 李秉昊(보성) ·李明瑞(광주)·柳漳 烈(고창)·高濟臣(부안)·崔勉植(서울)·李秉華(능주)·金泰守 등이 주목된다. 60) 조동걸, 「대한광복회연구」, 위의 책, 287쪽. 61) 위와 같음, 302-9쪽. 62) 위와 같음, 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