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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99 3. 光復會 전남지부의 활동 1915년 7월 15일 朴尙鎭은 光復會를 결성하였다. 41) 박상진은 울산에서 태어나 경주로 이거했는데, 대대로 文翰과 경제력을 겸비한 혁신유림이었다. 42) 그는 養正義塾에서 신학문을 배우기도 하였으나 스승인 의병장 許蔿가 순국하자 1년 동안 喪主의 예를 다했다. 43) 1911년에 그는 만주에 들어가 중국혁명의 영향을 직접 목격했으며, 李相龍·許蒹 등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국내외 정세를 의논하였다. 이내 귀국한 그는 1912년에 대구에 尙德泰商會를 만들어 독립운동세력을 비밀리에 지원하였다. 상덕태상회는 국내 연락은 물론 만주의 安東·長春 등에 설치한 독립군의 연락기관과 기맥을 통하였다. 당시 광복회의 편제에 대해서는 禹在龍의 「白山實記』와 韓焄이 남긴 「光復會』 44) 가 참고된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광복회 조직의 주요 직제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總司令 朴尙鎭, 指揮長 禹在龍, 參謀長 權寧萬 韓焄, 支部長: 蔡基中(경상도) 金漢鍾(충청도) 李秉燦 (전라도) 金善浩(경기도) 崔鳳周(함경도) 趙賢均(평안도) 李海量(황해도) 金東浩(강원도) 本部 會長 朴尙鎭 (중략), 滿洲司令官 李奭大, 財務部長 崔浚, 宣傳部長 金敬泰 權國弼 庾昌順 張斗煥 李秉華, 國外: 滿洲 安東旅館 孫晦堂, 奉天 三達洋行 精米所 鄭舜永. 위에 열거한 인물중 광복회의 핵심지도부는 박상진 채기중 우재룡 등이었다. 45) 이처럼 광복회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경상·충청도 출신들이 많은 편이다. 실제 활동도 이들 지역에서 비교적 활발하였다. 당시 일제는 1918년 1월 발각될 당시 광복회의 구성원을 충청도 20명, 경상도 17명, 황해도 6명 순으로 파악하였다. 46) 이들을 검토해보면 광복회는 의병세력을 주축으로 계몽운동계열까지 규합하여 1916년이후 서울과 충청도 및 서간도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47) 그렇다면 광복회의 전라도지부는 과연 존재했는지 궁금하다. 광복회 전라도 지부는 李秉燦(일명 秉昊)가 맡고 있었으며, 韓焄 柳漳烈 등이 전라도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유장렬은 전북 고창 41) 김희곤 편, 「光復會--光復會復活趣旨及沿革」(1945),「朴尙鎭資料集』(독립기념관, 2000), 386쪽. 42) 조동걸, 「대한광복회의 결성과 그 선행조직」, 위의 책, 265-6쪽 및 朴永錫, 「大韓光復會硏究」, 「한국민족운동사연 구』1(1986), 76-9쪽. 43) 조동걸, 「대한광복회의 결성과 그 선행조직」, 위의 책, 265-6쪽. 44)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386-8쪽. 45) 권대웅, 박사학위논문, 53쪽. 46) 『고등경찰요사』, 1934, 179-83쪽 ; 김희곤 편, 『박상진자료집』, 1-24쪽 참조. 47) 조동걸, 「대한광복회연구」, 위의 책, 273-4쪽. 그런데 滿洲의 경우 광복회의 본부가 있었는지 혹은 지부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우재룡은 1915년 음력 12월경 신민회 계통의 주진수·손일민 등과 광복회를 결성했음을 밝힌 바 있다 (『독립운동사자료집』10, 1109쪽 및 『한민족독립운동사』32(국사편찬위원회, 1997), 236쪽 참조). 그리고 채기중은 1918년 음력 4월에 李秉昊에게 광복회 가입을 권유하면서 본부가 서간도에 있고, 지부는 조선에 있다고 언급하였으 며, 박상진 역시 장두환에게 서간도에 가서 광복회 활동을 전개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한 바 있고 충청도에서 조달한 군자금 역시 서간도로 보낸다고 언급하였다(『독립운동사자료집』11, 692-6쪽).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만주 의 서간도 지역에 광복회의 주요 근거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