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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97 분석한 후 외교론적 방법에 의한 독립의 환원을 기대하였다. 27) 이들이 계획했던 외교론적 방법론에 대한 평가는 현재 엇갈리고 있지만, 28) 장서를 통한 외교론적 방법은 의병항쟁기에도 자주 사용되었던 점으로 보아 의병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9) 더욱이 앞서 보았듯이 독립의군부를 주도하거나 참여한 인사들은 대체로 의병계열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의병의 상소운동이나 향약 부흥운동을 계승하였다는 점 30) 에서 보더라도 이들의 활동을 의병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독립의군부는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단계의 전환기의병이라 할 수 있다. 독립의군부를 전환기의병으로 볼 수 있는 배경은 그 명칭에서도 찾아진다. 임병찬을 비롯한 의병계열의 주요 인물들이 주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이란 명칭 대신에 ‘獨立義軍’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자, 이들은 스스로 ‘독립의군’을 자임하면서 독립을 되찾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한 것이다. 종래 의병들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활동이라 할 수 있으나, 일제의 강점 이후 이들은 亡國을 인정하고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독립의군부는 1910년대 이후 의병계열이 독립군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는, 1910년 6월에 결성된 연해주의 十三道義軍과도 비교된다. 13도의군은 의병장 柳麟錫의 주도로 연해주의병을 모체로 하여 다양한 독립운동세력을 통합, 결성되었다. 그런데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역시 ‘의군’이라 표방하였다. 여기에서도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해가는 과도기적 단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독립의군부의 관제를 검토해보면, 행정기관과 민권기관으로 양분된 특징이 있다. 31) 먼저 행정기관은 兵馬都總長을 정점으로 司令總長 巡撫總長 관찰사 부사 군수 鄕長 면장 이장 통장의 체제로 되어 있다. 이들은 종1품에서 9품까지 품계가 주어지며, 육군 직제인 副將에서 參校까지 배치시켰다. 다음으로 민권기관은 參謀總約長에서 約正까지 두었으며, 성균관 관제인 대제학에서 교수까지의 서열과 일치시켰다. 이로써 보면 행정기관은 군사조직과 일치시켰다는 점에서 독립운동단체로서의 위상을 갖게 하였고, 민권기관은 향약체제에 의해 사림들이 장악하도록 구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32) 독립의군부의 지도부는 국권을 환원받는다면 즉시 향약을 실시하여 군주권을 비롯한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독립의군부는 복벽주의를 지향한 독립운동단체라 할 수 있다. 한편, 독립의군부는 이른바 ‘以文制武’의 논리에 의해 전국적으로 동시에 장서운동을 펼칠 계획이었다. 33) 즉, 전국의 360개 군이 동시에 총독부와 외국공관, 도에 주재하는 경무부 및 27) 신규수, 앞의 논문 및 이상찬, 앞의 논문 참조. 28) 신규수와 이상찬은 앞의 논문에서 긍정 부정적으로 각기 평가하였다. 특히 이상찬은 이들의 외교론적 대응을 의병항 쟁의 일환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이상찬, 앞의 논문, 825쪽). 29) 권영배, 「檄文類를 통해 본 舊韓末 義兵抗爭의 性格」(경북대 박사학위논문, 1995), 40, 152, 268, 288-289쪽. 30) 이상찬, 앞의 논문, 816-819쪽. 31) 위의 논문, 812쪽. 32) 위의 논문, 812-813쪽. 33) 임병찬, 『의병항쟁일기』, 「管見」, 118-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