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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06년 홍주의병에 가담했다가 종신유배형을 받은 인물이다. 16) 이들은 李寅淳 李 侙 김재순 이정로 등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비밀결사의 조직과 활동방향을 협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식은 1906년 홍주의병의 소모사로 활동한 충남 청양 출신으로, 이른바 홍주 9의사중 한 사람으로서 대마도에 감금된 바 있었다. 아마도 그는 고종과 접촉하여 고종의 의사를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재순은 서울출신으로 망국이전 중추원 의관과 평리원 판사를 역임한 인물이었는데, 당시 經濟硏究會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국내사정을 관망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찾던 중 독립의군부와 연결되었다. 17) 이처럼 독립의군부의 결성 초에는 서울의 전직관료이거나 홍주의병에 가담한 충청도 출신들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의군’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하고, 동지규합과 재정확보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이식은 고종의 의사를 임병찬에 전달하며 독립의군부의 조직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즉, 1912년 음력 9월 하순 이식은 임병찬에게 고종의 密勅을 받았다. 18) 임병찬은 이들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아들인 응철을 서울로 파견한 듯하다. 임응철은 1913년 1월 김재순 곽한일 이식 등과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19) 그러면 이식 등이 임병찬을 독립의군부에 참여시키려는 의도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1906년 의병에 가담한 점만을 고려했을 20) 수도 있으나 보다 구체적인 의도와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최익현을 도와 태인의병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 같이 구금된 전력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대마도 구금 당시 이식과 임병찬은 서로의 언행을 파악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서로 믿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종 역시 임병찬을 신뢰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종은 임병찬이 가장 강력한 의병항쟁을 유발한 태인의병의 실질적인 주도자라는 점이라든가, 식견이 뛰어난 행정가이자 전략가라는 점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가 왜란 당시 의병의 본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반일투쟁을 전개한 한말 후기의병의 중심무대였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결국 임병찬은 서울에서 돌아온 아들로부터 상황을 청취한 후 이식 등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이식은 고종과 임병찬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1913년 음력 2월, 임병찬은 전라북도 태인을 중심으로 독립의군부의 전라도 조직 건설에 매진하였다. 아래의 기록이 그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1913. 음 2) 이로부터 문생과 자손들로 하여금 여러 군의 동지와 의사들을 불러 모으고 거의를 준비 16) 「민종식 외 판결문 6인 판결문」(평리원 판결문, 1907.7.2.) 참조. 17) 每日申報 1915년 3월 16일자 「大膽巧譎 詐欺團」. 18) 임병찬, 「擧義日記」, 『義兵抗爭日記』(한국인문과학원, 1986), 239쪽. 한편, 신규수는, 1912년 음력 9월 임병찬이 독 립의군부 전라남도순무대장에 임명되면서 독립의군부의 조직이 본격화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신규수, 「日帝下 獨立義軍府 運動에 관한 硏究」, 『역사와 사회』 22, 원광대, 1999, 77쪽). 19) 「김재순 곽한일 전용규 이정로 판결문」, 0280-0281쪽. 20) 신규수, 앞의 논문, 1999,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