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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을 알고 괴목리 월등(月燈) 두 주재소 일선인 순사 각 한명씩 체포키 위하여 쌍암주재소의 응원을 있 어가지고 일행 여섯명이 지나간 이십일일밤중에 잠자는 틈을 타서 일본인 순사 두명은 문에서 파수 를 보게 하고 또 일순사 두명과 조선인 순사 한명은 문을 단속하고 좌등순사부장은 속문으로 돌아들 어가는데 강대장은 벌써 경관이 들어온 줄 알고 뒷문으로부터 도망코자 할 즈음에 좌등부장이 방안 에 들어서자마자 강대장은 길이가 다섯치 되는 칼로 좌등부장의 바른편 젖통이를 길이가 일촌오푼이 나 되고 깊기는 갈비대에 이를만한 중상을 당하게 하였으나 좌등부장은 굽히지 않고 범인과 서로 격 투할 때에 강대장은 또다시 좌등부장의 등 뒤와 팔뚝과 손가락 등 여러곳을 찌른지라 좌등부장은 역 시 굴하지 않고 OOO하는 중에 바깥문을 지키고 있던 대평(大坪)과 좌등(佐藤) 두 순사가 달려들어 포 박하였는데 좌등부장은 즉시 순천병원으로 메여들어가 치료중인데 생명에는 아무 염려가 없을 듯하 다더라(조선일보 1921년 8월 31일자 3면) 흔히 강대장이라 불리는 강형오 의병장이 1921년 8월 21일 순천의 괴목 월등 쌍암 주재소의 연합 순사대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10) 그는 의병전쟁이 일단락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체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사에 있듯이 그는 체포 직전까지 5-6명의 동지들과 함께 ‘강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여기서의 ‘강도단’은 아마도 비밀결사단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전라남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비밀결사로는 독립의군부와 광복회 전남지부 등을 들 수 있다. 11) 이들도 이러한 단체와 관련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당시 그는 지들을 발설할 것을 우려하여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 후유증으로 음력 7월 19일(양력 8월 22일) 순천헌병대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2) 요컨대, 강형오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10)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는 관련 기사가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같은 날짜 동아일보에도 비슷한 기사 실 려 있다. 참고로 그 내용을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往時의 義兵頭目 -강형오 등 톄포 순사 한명은 부상· 전라남도 순텬군(全南 順天郡) 출 ᄉᆡᆼ으로 각처에서 강대장이란 일흠을 듯는 강형오(姜炯吾)(四二)는 일한병합이 된 후 의병 이라 칭하고 부하 수ᄇᆡᆨ명을 거나리고 전라남북도 각 디방에서 헌병수비대와 여러번 교전되여 부하의 대부분은 임 의 톄포처분되고 오륙명의 부하로 강도단을 조직하야 가지고 도라다니며 강도살인을 하얏는대 순텬헌병대에서 여러번 그의 잇는 곳을 탐지하얏스나 강형오는 신출귀몰한 ᄒᆡᆼ동으로 잡히지 아니 하얏섯는대 금번에 그의 부하 한명이 순 텬군 괴목경찰관주재소(槐木警察官駐在所)에 톄포되야 그 자ᄇᆡᆨ으로 강대장이 지금 순텬군 쌍암면 두월리(順天郡 雙巖面 斗月里)에 잇는 줄 알고 괴목(槐木) 주재소에서 합력하야 순사 여섯명이 출장하야 댱시간 동안 격투한 후 톄포 하얏는대 톄포할 ᄯᅢ에 좌등(佐藤) 순사는 강형오의 칼에 마저서 중상을 당하얏다더라(東亞日報 1921년 8월 31일자 3면). 11) 홍영기, 「1910년대 전남지역의 항일비밀결사」, 『전남사학』 19(2002). 12) 『약전』, 170쪽. 한편, 강진원이 죽자 일본 헌병대에서는 그의 시신을 헌병대 앞에 방치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순천의 대표적인 유학자 南坡 金孝燦이 그의 제사를 지내주려 하자 일본헌병들이 방해하였다. 즉, 일본 헌병대에서 ‘무엇 때 문에 폭도대장의 제사를 지내려고 하느냐’며 힐난하자, 그는 ‘이 사람이 당신네들을 얼마나 괴롭혔는가,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당신들을 괴롭힐 터이니 이 사람의 혼백을 모시어 달래주어야 할 것 아니냐’고 답변하여 제사를 지낼 수 있 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 헌병들이 인부들을 동원하여 강진원의 시신을 삼산동 동천 건너 속칭 호랑이골짜기 부근에 매장했다고 하나 분실되고 말았다(『약전』,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