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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89 순천시 서면 索川社亭에서 기습을 20명 내외로 급감하였다. 381) 이때 생존한 의병들은 대부분 뿔뿔히 흩어졌으며, 강진원 역시 순천시 신성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蓮內島로 피신하였다. 382) 이후의 행적은 거의 나타나지 않은데, 이들은 1909년 9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해산된 것으로 믿어진다. 그로 인해 일본군의 대규모 군사작전 당시 그는 체포를 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강진원 의병부대의 선봉장 崔性裁는 순천 출신으로 처음에 조규하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조규하 의병장이 전사하자 그 뒤를 이은 강진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383) 한때 그는 강진원 의병장을 대신하여 부대를 통솔하기도 하였으나, 1909년 3월 서면 구정리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경남 남해로 잠복하였다. 그후 ‘남한폭도대토벌작전’ 기간 중에 그는 다시 육지로 나와 지리산 자락의 구례에 은둔하려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1909년 9월 그는 광주지방재판소로 호송되는 도중 일제 순사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384) 연내도로 피신했던 강진원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군사작전이 종료되자 순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순천의 두모리에 위치한 오성산 동굴에 은신하였다. 385)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 장영섭을 비롯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은밀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음력 7월 16일 체포되었는데, 386) 비 밀 을 지 키 기 위 하 여 옥 중 에 서 자 결 한 것 으 로 전 해 진 다. 이 와 같 이 강 형 오 는 이 른 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중에 살아남아 10여 년간 국내에 잠복하며 훗날을 도모하려 한 점에서 주목된다. 381) 『편책』, 『독운사』 15, 141쪽 및 같은 책 16, 178쪽.. 382) 「취웅록」, 13쪽 ; 『약전』, 152-153쪽. 383) 위의 책, 495-496쪽. 384) 위의 책, 496쪽. 385) 『약전』, 163쪽. 386) 위의 책, 29 163-8쪽 ; 『동아일보』 1921년 8월 31일자 ; 『조선일보』 1921년 8월 31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