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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 姜炯吾 의병부대 강형오(1881-1921)은 현재의 전남 순천시 서면에서 태어났다. 376)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377) 아마도 그의 본명은 형오(炯吾 혹은 亨佑), 혹은 改名하여 姜震遠(혹은 姜振遠), 자는 勝宇였는데 의병활동을 할 당시에는 몇 개의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믿어진다.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그는 연로한 어머니와 병약한 동생을 데리고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가난을 떨치기 힘든 처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외가인 두모리 신기 마을로 이거하여 남의 집에 서당을 개설하고서 십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당시 시국을 걱정하던 그는 마침내 1908년 음력 6월 순천출신의 김명거 김화삼 권덕윤 김병학 그리고 곡성 출신의 김양화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378) 이들은 1908년 음력 6월 하순 민가에서 총기를 거두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계산을 근거지삼아 무기를 수리하고 의병의 규모를 확대하는데 노력하였다. 음력 7월 인근에서 활동중인 조규하 의병장과 만나 연합투쟁을 모색하였으며, 나주의 의병들이 그의 의병부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379) 의병의 면모를 갖춘 이들은 음력 8월 4일 곡성 조지촌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들은 화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나아가 대일항전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인근에서 활동 중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예컨대, 1908년 9월 이들은 조규하 의병부대 등과 함께 곡성군 목사동면 평전촌에서 일본군 순사대 및 수비대와 맞서 싸우다 조규하 의병장을 비롯한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380) 이때 조규하 의병장의 전사로 인해 조규하 휘하의 의병들은 강진원 의병부대로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반일투쟁은 그가 의병을 해산한 1909년 음력 8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전남 동부지역, 주로 순천 곡성 여수 고흥 광양 구례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기구 및 일본군경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이들은 과역시장, 동복 운월치, 쌍암 접치, 쌍암 서정, 남원 가정, 곡성 압록과 동리사 등지에서 크고작은 전투를 치렀다. 반일투쟁 외에도 이들은 친일세력의 구축에도 앞장섰다. 예컨대, 일본어 통역이나 헌병보조원, 의병을 밀고한 자, 세무관리, 밀정 등을 처단하였다. 또한 강진원 의병장은 군율을 어긴 의병들도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주민들을 토색한 자, 군자금을 몰래 유용한 자, 의진을 이탈한 자, 무기를 빼돌린 자 등을 처형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지역민들의 지지를 기반삼아 장기항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100여 명의 규모를 유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1909년 음력 6월 중순 376) 『姜振遠 義兵將 略傳』, 민족문화협회 편찬실 편(횃불사, 1981), 31쪽. 377) 『순천시사』 정치·사회편(큰기획, 1997), 569쪽. 378) 「취웅록」, 3쪽. 379) 「취웅록」, 3쪽 ; 『약전』, 70-71쪽. 380) 『폭도사』, 64쪽 및 「취웅록」, 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