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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87 추적에 나섰다. 그 결과 황병학 의병부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광양 옥곡원의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등 전남 동부지역 항일투쟁을 선도했다. 이 과정에서 왼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황병학은 의병부대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활동케 한 다음, 자신은 백운산 용신암에 은신하여 부상을 치료했다. 369) 어느 정도 몸이 완쾌되자 황병학은 다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는 대규모의 군경을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의병에 대한 회유공작도 병행했다. 의병장의 부상으로 상당수의 의병들은 크게 동요되었고, 일부는 몰래 빠져나간 경우도 없지 않았다. 더욱이 비촌 마을에 사는 황씨 일족들의 곤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즉, 황씨 집성촌인 비촌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협박과 폭력을 휘둘렀으며, 황병학과 황순모의 집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를 불태우기도 했다. 370) 황병학 의병부대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황병학은 일단 여수 猫島로 잠적했다가 재기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그의 종숙 황순모 한규순 등 몇몇 의병들은 가족들의 후환을 걱정한 나머지 귀순했다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371) 묘도에 잠적 중이던 황병학 의병부대도 일본 군경에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백학선 등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살아 남은 의병들은 이를 악물고 악전고투를 하다가 일제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전개되던 1909년 후반에 눈물을 머금고 해산했다. 국내에 잠적이던 그는 삼일운동을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전선에 나섰다. 고흥에 은거중이던 奇山度와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해외로 망명하기로 한 것이다. 372) 기산도는 5적암살단을 결성하여 매국노 이근택을 처단하려던 우국지사였다. 373) 황병학은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국민대회 특파위원의 자격으로 전라도의 뜻있는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다. 그리하여 평안도까지 함께 올라갔으나 황병학만이 압록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한편, 1923년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명을 띠고 귀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374) 1927년 평양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다. 고향 비촌을 둘러본 후 발길을 돌리려던 그를 병마가 붙들었다. 오랜 항일투쟁의 여독과 고문의 후유증이 깊었던 그는 1931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375) 그의 의병활동에 관한 얽히고 설킨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어 백운산 골짜기에 구전되고 있다. 369) 황병선, 『黃珣模義士 抗日鬪爭史』(1968), 105 151-2쪽. 370) 황병선, 앞의 책, 32-35 246쪽. 371) 위의 책, 254 262쪽 및 金楠 編, 『義士 黃炳學』(전광산업사, 1983), 33-34쪽 참조. 372) 『韓國民族運動史料』 2(국회도서관, 1978), 499-501쪽. 373) 황성신문 1906년 2월 19일자 「軍大被刺顚末」. 374) 김남 편, 앞의 책, 23-24쪽. 375) 위의 책,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