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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85 그 해(1909 ; 필자주) 8월 일을 하면서 安과 뜻이 맞지 않아 아들 학규와 임참봉 등과 함께 따로 기치 를 들었으나 이에 이르러 전몰했다(『폭도사』, 141쪽). 임창모 등은 안규홍과 뜻이 맞지 않아 1909년 8월 의진을 나누어 활동하다 순국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의병의 해산을 반대하고 임창모에게 가담했던 의병들은 사상적으로 반일의식이 철저한 양반이나 유생 출신이었다. 임참봉이란 인물이 그 대표적인 본보기라 할 수 있는데, 그는 1909년 4월에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서 처와 형수를 살해하고 집을 소각한 후 곧바로 안규홍 의진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363) 이들의 투철한 배일사상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일본군의 거미줄 같은 포위망이 시시각각 압축되자, 그동안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해 왔던 안규홍 의진도 마침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9월 18-19일 사이에 지도부를 포함한 60여 명의 부하들이 투항하고 말았다. 364) 결국 의병장 안규홍은 부하들에게 해산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군은 이제 일을 이루지 못하리라 판단하고서 여러 의병들에게 이르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천운이 일정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으니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또한 이치로서도 그러하다.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후원도 없 고, 안으로는 범이 잡아먹으려는 위급한 지경에 있다. 게다가 선량한 백성에게 해독이 미치고 있으니 나의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여러분들은 각자 잘 계획하여 다시 후일의 거사를 도모하라”고 하 였다. 마침내 의병을 해산하였다(『담산실기』, 「가장」). 그는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대가 워낙 강하므로 후일을 기약하고서 의병을 해산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그 역시 9월 25일에 염재보 등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365) 안규홍 의병장을 비롯한 주요 수뇌부는 대부분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안규홍 의진의 구성원 가운데 일부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해산을 전후하여 체포되거나 투항한 자들도 있었다. 혹은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366) ‘안담사리의병’의 해산과 의병장 안규홍 등 의병 지도부의 체포는 곧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의 종료를 의미하였다. 이 작전이 끝난 후, 일본군은 가장 뛰어난 전과를 올린 부대를 표창하였다. 안규홍을 체포한 보병 제2연대 제8중대, 심남일과 강무경 등을 체포한 제3중대, 그리고 해남에서 활동하던 황두일 황준성 이하 150여 명을 체포·자수케 한 제60중대가 그것이다. 367) 이 점만 363) 『편책』, 『독운사』 15, 302쪽.  364) 『폭도사』, 136쪽 참조. 365) 위의 책, 137쪽과 김정명 편, 앞의 책, 72쪽. 366) 『澹山實記』, 「義士柳德三行蹟」 참조. 367) 『편책』, 『독운사』 1, 82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