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page

한말의병 283 하지만 이들의 반일투쟁이 언제나 활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진 자체가 와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355) 이때 안규홍을 포함한 다수의 의병들이 근거지를 떠나 남해의 섬으로 몸을 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패전 후 두달 만인 1908년 음력 7월에 석호산에서 흩어진 의병을 모아 재기하였다. 당시 토착농민들과 의병장 심남일 등의 각별한 도움이 그의 재기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356) 이때부터 안규홍과 심남일 사이에는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어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반일투쟁을 주도하였다. 안규홍 의진은 이와 같은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월에 호남의병에 대한 진압책을 시행하였다. 357) 일제가 진압책 가운데 유화책을 먼저 선택했는데, 그들이 활용한 유화책은 전라남도를 관통하는 도로와 통신망을 개설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의병에 투신하는 것을 미리 예방하자는 목적이 있었으나,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1909년 4월 안규홍 의병부대를 진압할 목적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였다. 358) 당시 일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광주와 남원의 2개 대대를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했으나 무력진압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물론 일제의 적극적인 의병진압활동은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1909. 음 3. 8) 여러 의병장들이 소식을 듣고 와서 모였기로 나(심남일-저자주)는 그들에게 말하였 다. “적의 세력이 점차 치열하여 폭학을 감행하니 그 세력을 막기 힘들므로 여러 陣이 모두 모여 적 을 밖으로 유인해서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 (중략) 한편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 어 적의 기세를 격동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진의 의병장들에게 통고하였다. 그래서 영산강 북 쪽의 전수용 이대극 오인수, 무등산 동쪽의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 등 水北山東의 의병장이 모두 모여 의논하였다(『沈南一實記』, 「南平巨聲洞接戰」). 날로 증대하는 일본군의 위협을 꺾기 위해 영산강 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전해산 이대극 오인수, 무등산 동부지역의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 그리고 남부지역의 심남일 등 당시 전라남도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진들이 연합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기로 의논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호남의병의 연합항쟁은 일본군의 위력적인 진압작전에 대한 대응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호남의병의 이러한 연합항쟁은 1908년 말부터 시도되었는데, 11개의 비교적 규모가 큰 의진들이 355) 위와 같음. 356) 『담산실기』, 「家狀」과 『노월헌유고』 제4책, 「종제재보행록」 참조. 357) 『편책』, 『독운사』 13, 140-143쪽. 358) 『폭도사』, 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