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page

27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운량관인 점으로 보아, 그가 직접 의병에 투신했다기보다는 음식과 식량을 제공한 숨은 후원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임창모 부자와 안찬재 등은 모두 유생들이다. 이들은 안규홍 의진에 처음부터 참여한 것이 아니라, 1909년 4월을 전후한 시기에 가담하였다. 이들 가운데 임창모(1868-1909)가 주목된다.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관직에 오른 적은 없으나 문필과 수렵에 능한 인물이었다. 347) 1907년초 그는 梁會一이 중심이 된 雙山義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5년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1907년 말에 사면되었다. 348) 그는 1909년 4월에 안규홍 의진에 영입되어 중군장을 맡았다. 그가 다소 늦게 가담하였지만 유생 출신들이 머슴 출신의 안규홍과 함께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다. 이미 앞서 보았듯이 안규홍이 1908년 초에 의병을 계획할 때에는 양반 유생들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이들이 가담한 1909년 4월경 ‘안담사리의병’은 매우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349) 그러므로 이들의 가담은 ‘안담사리의병’의 뛰어난 활약의 결과에 말미암은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결국 이때부터는 신분적인 갈등보다는 항일투쟁이 우선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350) 다시 말해서 반일투쟁을 위해서라면 모든 계층이 서로 협력하는 상황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머슴 출신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양반 유생들이 가담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고 하겠다. 3-3) 안규홍 의병부대의 활동 그러면 ‘安담사리의병’의 활동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또한 이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의 인용문이 주목된다. 염재보가 안규홍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농촌의 백성으로, 노고를 견디지 못해 萬死를 무릅쓰고 일어났다. 위로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였고, 또 아래로는 세력을 나타냄도 없었다. 헛되이 먹 기만 일삼고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를 사랑하고 백성을 구하며 원수의 복수를 갚는 의리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桐巢山中에서 군사를 먹인 다음 명령을 내렸는데, “의병으 로서 민간을 침포하는 행위를 금한다, 민간인이 밖으로 곡식을 파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여러 명목으 로 파견된 관원이 민간에 해를 끼치면 모두 잡아들인다, 무릇 고을에서 공공연히 誅求를 행하는 자를 근절시킨다, (일본세력을) 불러들이는 자부터 먼저 죽여서 우익을 없앤다, 외국침략자를 죽여서 그 새떼 같은 무리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본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의 명맥을 길이 보존해야 한 347) 『杏史實紀』 권 4, 「林昌模」 및 『兆陽林氏文獻錄』, 「大韓義士昌模公紀績碑」(金文鈺 찬, 1954), 1989, 386-388쪽. 348) 『폭도사』, 141쪽과 『구한국관보』 1907년 7월 15일자·1907년 12월 3일자 「司法」 참조. 349) 『편책』, 『독운사』 14, 650-651쪽 등. 350) 이 점은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과의 연합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입증된다.